4부.존재 이후의 세계_감정을 잃은 존재들

감정의 자리를 잃은 사회

by 김형건

감정은 인간 존재의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고, 이성보다 더 오래 남는 신호. 슬픔은 연대의 기원이었고, 분노는 정의의 불씨였으며, 기쁨은 삶을 가시화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우리는 언제나 감정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을 맞이하고,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 감정은 더 이상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관리되는 것'이 되었다. 슬픔은 타이밍을 맞춰야 하고, 분노는 대상에 따라 조율되며, 기쁨은 플랫폼의 언어에 맞게 포장된다. 감정은 이제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하는 것’,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구되는 것이 되었다. 감정은 살아 있는 것의 징후가 아니라, 사회적 행동의 일부로 코드화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감정을 연기하고, 학습하며, 반복할 뿐일까? 이 질문은 단지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구성 방식에 대한 전환을 드러낸다.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윤리를 잃고 있는 시대. 우리는 감정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감정의 자동화: 알고리즘에 맞춰 조율되는 감정

오늘날 우리는 감정을 ‘느끼기 전에’ 반응한다. 누군가의 소식에 “좋아요”를 누르는 손은, 실제 감정이 형성되기도 전에 플랫폼의 구조에 반응한 행동일 수 있다. 감정은 더 이상 순수하게 내면에서 자라나는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정해진 타이밍, 코드화된 표현, 사회적 기대에 따라 설계되고 소비되는 콘텐츠가 되었다. 우리는 분노의 패턴을 학습하고, 슬픔의 형식을 알고 있으며, 기쁨의 적정 강도를 눈치챈다. 감정은 이제 주관적 체험이 아니라 알고리즘의 피드백 루프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데이터'다.


그 결과,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재생산하는’ 존재로 이행하고 있다. 누군가의 분노가 실제 분노인지, 혹은 분노하는 척 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본인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감정은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 전달력의 문제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전달되지 않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플랫폼을 통해 증폭된 감정은 그것이 진짜든 아니든 ‘현실보다 더 강력한 실재’로 작동한다.


감정의 탈윤리화: 느끼지만 책임지지 않는 시대

감정이 자동화되고 패턴화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감정에 책임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땐 그냥 그랬어”, “감정이 앞섰을 뿐이야”라는 말은 감정이 곧 진실이며, 동시에 그 진실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회적 허용을 반영한다. 과거에는 감정이 행동의 동기이자, 도덕적 판단의 핵심이었다. 분노는 불의에 대한 저항이었고, 슬픔은 타인 고통에 대한 연루감이었으며, 기쁨은 함께함의 윤리적 징후였다. 그러나 지금, 감정은 더 이상 관계의 윤리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되, 책임지지 않는다. 감정을 공유하되, 연대하지 않는다.


이런 탈윤리화는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공공 영역에서도 우리는 점점 더 ‘느끼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방치하고 있다. 감동적인 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 감정이 현실의 고통을 바꾸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분노의 트윗을 날리지만, 구조를 바꾸는 노력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즉각적으로 소비되고, 공감은 재빨리 소진된다. 우리는 감정을 쉽게 시작하고, 더 쉽게 버린다. 감정이 윤리의 뿌리가 되지 못할 때, 공동체의 토대는 깊은 피로를 겪는다.


감정의 소모사회: 공감의 경제학

감정은 이제 순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주고받는 에너지의 흐름이 아니라, 추출되고 소비되는 자원이 되었다. SNS에서 우리는 ‘좋아요’를 받기 위해 감정을 드러내고, 누군가의 고통에 잠시 공감한 후, 빠르게 스크롤을 내린다. 뉴스 알고리즘은 분노와 공포를 동력 삼아 클릭을 유도하고, 기업은 감정적 몰입을 마케팅 전략으로 삼는다. 이 감정의 흐름은 순환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고받음’이 아니라 ‘끌어내고 버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감정이 일방적으로 추출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감정의 수신자가 되기를 피한다. 누군가의 슬픔에 오래 머무는 일, 타인의 분노를 온전히 감당하는 일, 아픔의 진짜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모든 것은 ‘에너지 낭비’처럼 여겨진다. 감정이 순환되려면 느림이 필요하고, 감응이 필요하며, 관계의 지속성이 요구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시스템은 그것을 ‘비효율’로 간주한다. 감정은 자주 호출되지만, 드물게 이해되고, 거의 회복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점점 더 많이 느끼지만, 점점 더 피로해진다.


감정의 피로와 윤리적 마비

감정은 원래 윤리적 신호였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느끼는 연민, 부정의에 대한 분노, 타인의 기쁨에 함께하는 기쁨—이 감정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직관적 응답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과도하게 호출되고, 소진되고, 회복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점점 더 무뎌진다.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과잉 자극으로 인한 방어다. 더 이상 감정이 윤리적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신 우리는 ‘정서적 탈진’을 윤리의 부재로 오인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명분으로 활용한다.


이 피로는 정치적 냉소주의로도 연결된다. 연대의 감정이 소셜미디어에서 소비되고 사라진 뒤,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기를 주저한다. 분노는 해시태그에 머물고, 공감은 리트윗으로 위탁된다. 감정은 여전히 많지만, 윤리는 희박하다. 감정을 느끼는 일이 더 이상 윤리적 선택이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감응의 조건

감정은 죽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지금, 지쳐 있을 뿐이다. 피로한 감정은 가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살아 있으려는 감정이 무기력함을 지나며 드러내는 마지막 몸짓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정제된 이성이나 도덕적 규범보다 먼저 세계에 반응한다. 우리가 다시 감정을 윤리의 가능성으로 복원하려면, 감정이 지닌 ‘반응성’의 의미부터 되짚어야 한다. 감정은 감응의 전제이며, 감응은 느낀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세계와의 연결을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다시 위대한 감정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작고, 느리고, 어색하고, 종종 말로 되지 않는 그 상태에서조차도 하나의 윤리적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련된 공감보다는 서툰 머뭇거림에서, 즉각적인 분노보다 사라지지 않는 찜찜함에서 더 깊은 윤리적 감도를 발견할 수 있다. 감정은 설명이 아니라 응시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라 응답의 자리에서 탄생한다.


감정을 다시 느끼기 위하여: 사유하는 존재의 감각

감정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세계와의 연결을 잃는다는 뜻이다. 감정이 자동화되고, 측정되고, 정량화되는 동안 우리는 점점 더 '정확하게' 반응하지만, 덜 느끼고, 덜 머문다. 우리는 자신이 뭘 느껴야 할지조차 외부의 코드에 의존하며, 감정은 상품처럼 진열되고, 도구처럼 사용된다. 그러나 그 감정들이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곧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감응적 존재로 산다는 것은, 이러한 자동화된 감정을 벗어나, 다시금 ‘느끼는 나’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더 이상 감정이 나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세계를 마주하는 방식이 되는 순간이다. 감정은 단지 안쪽의 정서가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윤리적 감각이다. 감정은 살아 있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느림이며,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반응하고 응답하려는 존재의 의지다.


우리는 감정을 다시 배워야 한다. 화내는 법이 아니라 머뭇거리는 법을, 위로하는 법이 아니라 함께 침묵하는 법을, 설득하는 말이 아니라 꺼내지 못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감정을 되찾는다는 것은, 다시 인간이 되는 일이며, 다시 세계를 감각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다. 이것은 시대의 요청이 아니라, 존재의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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