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정치화
퇴근길 지하철, 한 여인이 조용히 눈물을 삼킨다. 그녀가 왜 우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장면을 본 누군가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떨림을 자신의 내면에서 느낀다. 말도, 설명도 없지만, 그 침묵은 하나의 언어가 된다. 감정은 그처럼 설명 이전에 도달하는 울림이다. 우리는 그 순간, 감정이라는 문 앞에 선다.
감정은 오랫동안 인간을 '진짜'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공감은 고결하고, 슬픔은 깊으며, 기쁨은 순수한 것이라 여겨졌다. 우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이해하기 위해 감정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지금, 감정은 점점 피로해진다. 타인의 감정에 끊임없이 반응해야 하는 강박, 진심 어린 공감을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 언제나 '정서적으로 준비된 나'로 살아야 한다는 기대. 감정은 이제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일종의 역할과 의무가 되었다. 감정은 연기가 되었고, 그 연기는 생존의 기술이 되었다.
이 글은 앞선 에세이에서 살핀 감정의 상품화(1편), 분노의 소비(2편), 감정의 자동화(3편), 감정노동의 일상화(4편) 이후, 감정이 윤리와 정치의 장에서 어떻게 수행되고, 강요되며, 탈진하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그 피로를 넘어서 우리는 감정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는지를, ‘공감’이라는 개념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탐색하고자 한다.
오늘날 공감은 더 이상 자발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요구되고, 도덕적으로 명령되는 감정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그 사람의 감정을 헤아려야지.” 우리는 이런 문장들을 정언명령처럼 받아들인다. 공감은 이제 타인의 고통을 느껴야만 선해지고, 타인의 아픔에 반응해야만 도덕적인 인간으로 간주되는 감정 윤리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만약 내가 공감하지 않는다면? 혹은 내 감정이 타인과 다르다면, 나는 냉정한 사람인가? 공감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무감각하고 비도덕적인 존재로 낙인찍힌다. 감정은 더 이상 나의 진심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기대되는 ‘반응의 기술’이 되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공감이 중립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공감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적 코드, 권력 관계, 매체의 프레이밍에 따라 어떤 감정은 공감받고, 어떤 고통은 배제된다. 즉, 공감은 감정이 아니라 정치다. 그리고 그 정치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공감은 감정노동의 연장이다. 4편에서 다룬 감정노동이 직장에서의 미소, 서비스업에서의 친절, 플랫폼에서의 셀프 브랜딩이라면, 공감은 이제 정서적 윤리 수행의 이름으로 요구된다. 우리는 SNS에서 타인의 고통에 '좋아요'와 '댓글'을 남겨야 하고, 집단적인 분노에 동참해야 하며, 개인의 아픔에 정서적 참여자로 기능해야 한다.
문제는 이 공감이 피로하다는 점이다. 감정을 느끼기 전에 반응해야 하고, 그 반응은 늘 '진심'이어야 한다. 공감은 점점 더 전략이 되고, 의무가 되며, 기술이 된다. 그러나 진짜 감정은 기술처럼 반복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감정을 수행하면서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공감의 피로, 감정의 수행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감응(感應)'이라는 개념을 다시 꺼내본다. 이는 단지 공감의 고전적 대체어가 아니다. 감응은 감정을 동일화하거나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에 미세하게 반응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머무를 수 있는 용기’다.
『논어』 자로편의 “성심성의(誠心誠意)”는 타인을 나처럼 느끼려는 노력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 그 앞에 머무는 태도다. 『예기』에서는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마음을 맑게 한다”고 했다. 이 절제는 억제가 아니다. 감정과 자기 사이의 거리, 곧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반응할 수 있는 ‘내면의 여백’을 의미한다.
감응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자체를 허용하는 감정적 존재 방식이다. 말하지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관계,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침묵의 리듬. 공감이 감정을 중심으로 한다면, 감응은 존재를 중심으로 한다. 그것은 정서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존재의 파동이다.
오늘날 우리는 감정을 ‘관리’하며 살아간다.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피로, 진심과는 다른 리액션, 익숙한 감탄과 정형화된 위로. 앨리 러셀 혹실드가 말했듯이, 우리는 감정을 연기할 뿐 아니라, 그 연기가 ‘진짜 감정’처럼 느껴지도록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간다. 감정은 자아의 진실이 아니라 사회적 생존을 위한 연출이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더 탈진해간다.
이때 감응은 또 하나의 길이 된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수행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세계에 조용히 반응할 수 있는 방식. 불교의 ‘지관(止觀)’은 이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감정을 곧바로 반응하지 않고 잠시 멈추어 보는 태도, 감정을 내 안에서 바라보는 행위. 감응은 발화 이전의 응시, 반응 이전의 머무름이다. 그것은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허용하는 존재의 자세다.
우리는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으나, 동시에 너무 얕게 고립되어 있다. 감정은 많지만, 감각은 희미해졌고, 반응은 빠르지만, 여운은 사라졌다. 이 고립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깊은 응시다. 더 빠른 공감이 아니라, 더 느린 감응이다.
감응은 설득이 아니라 머무름, 해석이 아니라 공유, 참여가 아니라 동행이다. 공감이 선함의 증표가 아니라 피로의 원인이 된 이 시대에, 감응은 인간이 여전히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 윤리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중요하다. 공감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감정이 피로하고, 공감이 의무화된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는다.
말이 닿지 않을 때, 침묵이 머무를 수 있는가? 그 침묵 속에서, 감응은 시작된다. 그것은 이해가 아닌 공명이며, 반응이 아닌 존재다. 그리고 그 고요한 떨림 속에서, 새로운 윤리가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