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정의로운 시대는 왜 이토록 잔혹한가
지금 이 시대는 정의롭다. 너무나도 정의롭다. 모두가 옳고, 누구나 분노하며, 하나같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를 견디지 못한다. 지나가는 농담 하나에도 세상은 요동치고, 실수 하나에 사람은 사라진다. 이 시대의 정의는 빠르고, 강하고, 때로는 무섭다.
한 사람이 불쾌한 농담을 했다. 몇 초짜리 클립이 잘려 나왔고, 인터넷은 불탔다. 수많은 이들이 그 사람의 인격을 문제 삼고, 과거를 들추며, 일상적인 행보조차 감시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정의는 살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조용히 속삭였다. “무섭다.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사람이 사라진다.”
요즘 세상은 도덕적인 말로 가득하다. 누구나 정의를 말하고, 공정함을 강조하며, 타인의 언행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정의로운 말이 많아질수록, 실제 정의는 점점 희미해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정의란 무엇이며, 왜 모두가 정의를 말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토록 지치고, 분열되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가?
정의는 말의 형식을 띠는 순간, 통제 불능이 된다
정의는 원래 행동의 원칙이었다. 어떤 일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실천 윤리였다. 그러나 지금, 정의는 말의 형식으로 탈바꿈했다. 정의는 분석도, 성찰도 필요 없는 신속한 언어가 되었고, 논의의 출발점이 아니라 정체성의 선언이 되었다.
“그건 차별이야.”
“그건 혐오야.”
“그건 너무 이기적이야.”
이 문장들은 더 이상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깨인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정의는 판단이 아니라 표현이고, 실천이 아니라 퍼포먼스가 되었다. 감정의 온도 없이 던져지는 '정의의 언어'는 점점 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넓힌다.
모두가 정의롭기를 원하면, 정의는 가격을 잃는다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이란, 화폐의 남발로 인해 그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이다. 도덕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누구나 '나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이고, 그것이 너무나 쉽기에 정의는 더 이상 귀한 감정이 되지 못한다.
과거의 정의는 감수와 책임이 동반되었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거나, 구조를 바꾸기 위한 실천에는 고통이 뒤따랐다. 정의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감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댓글 하나, 공유 하나, 비난의 문장 하나로 정의의 편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정의는 점점 더 가볍고, 빠르며, 동시에 잔혹해진다.
정의는 선언되기 쉬워졌고, 그만큼 되묻기 어려워졌다. 의심하거나 질문하는 행위는 곧바로 '도덕성 부족'이라는 낙인이 되고 만다. 이는 정의가 윤리적 성찰이 아니라 감정적 반사행동으로 굳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정의로운 사람끼리 경쟁하는 세상
포스트모던 사회는 '절대적 기준'을 해체했다. 하지만 해체된 자리를 메운 것은 공백이 아니라 '상대적 우월감'이다. 지금 우리는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다’라는 위치에서 말하려 한다. 도덕은 실천이 아니라 위계가 되고, 정의는 방향이 아니라 비교가 된다.
문제는 이 순결 경쟁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 감수성이 조금만 부족해도 '가해자'가 되고, 그를 비판하지 않으면 '공범'이 된다. 누구도 완전할 수 없기에, 결국 모두가 서로를 감시하는 피로한 사회가 된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 더 결백한 사람으로 보이려 한다. 그것은 성장이나 변화의 여지를 지우고, 타인의 실수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공감 없는 정의는 연극이 된다
정의는 타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윤리적 실천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의는 감정적 응징으로 작동한다. “나는 분노했다”, “나는 침묵하지 않았다”, “나는 반응했다”는 말은 모두 의미 있는 선언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맥락과 책임이 결여된 채 반복될 때, 그것은 관객 앞에서의 윤리적 연극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때때로, 그 문제의 당사자가 아닌데도 가장 큰 소리를 내고 싶어 한다. 윤리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윤리의 해설자가 되고 싶어 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단죄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올바른 위치’에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이 구조는 결국 공감의 결핍을 낳는다. 정의는 연결과 돌봄이 아니라, 구별과 배제를 위한 언어가 되어간다.
도덕 피로감: 우리가 서로를 견딜 수 없게 되는 상태
도덕의 인플레이션은 개인에게도, 공동체에도 심각한 피로를 낳는다. 누구의 말 한마디도 쉽게 단죄당할 수 있고, 모든 관계가 정치적이거나 도덕적인 ‘입장’으로 변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제 터질지 모를 검열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이 피로는 무관심이나 냉소가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감정 과부하와 경계 상태다. 사람들은 윤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윤리에 지쳐 간다. 지친 윤리는 종종 폭력으로 회귀하거나, 반대로 완전한 회피로 귀결된다. 그 둘 모두, 사회적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정의의 총량이 아니라, 방향을 다시 고민해야 한다
지금의 정의는 “내가 옳은가?”라는 질문에 멈춘다. 그러나 이 질문은 싸우기 위한 문장이며, 단절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누구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가?”
“내가 지금 말하는 이 정의는, 누구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가?”
“그 사람의 과거를 비난하기 전에, 나는 그 삶을 충분히 알고 있는가?”
정의는 말보다 느려야 하고, 판단보다 맥락이 앞서야 하며, 선언보다 책임의 실감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정의의 밀도이며, 우리가 잃어버린 윤리의 깊이이다. 정의는 단죄가 아니다. 정의는 단순히 누군가를 옳고 그름의 스펙트럼 위에 세우는 일이 아니다. 진짜 정의는, 내가 지금 뭘 놓치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는 불편한 감정이다. 그것은 불쾌감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더 오래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정의의 목소리를 줄이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말이 얼마나 많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하자는 것이다. 정의는 총량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과 밀도의 문제다. 공정함을 말하기 전에, 정중함을 지킬 수 있는가. 분노하기 전에, 이해할 수 있는가.
말하지 않아도 정의로울 수 있는 사람, 정의라는 말을 말하지 않고도 책임질 수 있는 구조. 우리는 이제, 그 조용한 윤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곳에서야말로 정의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말보다 행동으로, 비교보다 맥락으로, 응징보다 돌봄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는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