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윤리의 피로_사과의 정크시대

감시하는 군중, 용서하지 않는 사회

by 김형건

누군가 잘못을 저지른다. 소속사는 이틀 혹은 사흘의 침묵을 지킨 뒤, 익숙한 문체의 사과문을 올린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당분간 자숙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더 나은 연기로, 경기력으로,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이 문장은 이제 감동의 언어가 아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복제품이다. 우리는 이 시나리오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실수 → 자숙 → 눈물 한 방울 → 보답 → 재평가 → 복귀. 그 서사는 정형화된 각본처럼 반복되며, 더 이상 우리를 설득하지 못한다.


문제는 잘못이 반복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반성조차 하나의 서사적 공식이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우리는 감동보다 의심이 먼저 앞선다. 감정이 아니라 연출 여부를 먼저 묻는다. 우리는, 속지 않기로 했다.




도덕은 대중화되었지만, 가벼워졌다

도덕은 더 이상 철학자의 책상 위나 법전 속 문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도덕은 지금, 스마트폰을 든 수많은 손끝 위에서 실시간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을 확인하고, 해명과 사과문을 읽으며, 자숙의 시간을 '며칠째'로 환산하고, 전 과정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판단한다. 대중은 더 이상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은 감시자이며, 동시에 윤리적 판결을 내리는 심판자가 되었다.


과거의 대중은 지금보다 훨씬 관대했다. 우리는 연예인의 스캔들을 흘려보냈고, 운동선수의 사고에는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라며 이해를 베풀었다. 그들을 사랑했던 이유는 도덕성이 아니라, 재능 때문이었다. 우리는 노래를 들었고, 경기를 즐겼으며, 사생활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윤리는 사라졌던 것이 아니라, 성과에 의해 유예된 윤리였다.


지금은 다르다. 개인의 잘못이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즉각 공적 단죄의 무대로 끌려 나온다. 그 과정에서 대중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자가 된다. '도덕적 관객'에서 '윤리적 감독자'로의 전환. 이 변화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연출된 반성, 불신의 사회

지금 우리는 사과문 하나에도 의심의 눈을 들이댄다. "PR팀 냄새가 난다", "너무 계산적이다." 감동보다 카메라 각도를 먼저 의심한다. 이 변화는 단순한 냉소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의 진화에서 비롯되었다. SNS는 개인의 시선을 집단 감시로 증폭시켰고, 누구나 비평가가 되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시대, 우리는 처음으로, '사과'가 얼마나 자주 피해자를 배제한 연출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대중은 실력보다 자격을 묻는다.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보다 '누구로서 다시 서는가'가 중요해졌다. 질문은 바뀌었다.


"당신은 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는가?"

"당신의 복귀는 누구의 상처 위에 세워진 것인가?"

"당신의 눈물은 진심인가, 아니면 전략인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된 경험 속에서 형성된 윤리 감각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장면을 보아왔다. 고개를 숙이며 울던 가수는 몇 달 뒤, 더 좋은 앨범으로 복귀했고, 사과하던 배우는 다시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 옆엔 늘 있었다. "보답하겠다"는 말.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그 보답은 면죄부가 아니라, 상품의 재포장이라는 것을.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 마케팅이다.


감시인가, 윤리적 각성인가

그래서 대중은 이제 그 말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 그 말을 꺼낸 순간 분노는 시작된다. 누군가는 말한다. "요즘 대중은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지금의 대중은, 과거보다 훨씬 윤리적이다. 그들은 실수를 낭만화하지 않고, 사생활을 방패로 삼는 회피를 거부한다. 그들은 기억하고, 추적하고, 분석하며, 감정과 구조를 연결할 줄 아는 주체가 되었다. 분노할 줄 아는 자, 윤리를 말할 자다.


이 변화는 사회의 언어 자체를 바꾸고 있다. 사과는 더 이상 감정의 연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험대다. 어떤 단어를 쓰는가, 어떤 행동을 멈추는가, 무엇보다 그 잘못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가. 눈물은 진정성의 증거가 아니며, 침묵도 면죄부가 아니다. 침묵조차 분석의 대상이 되는 시대, 우리는 진정으로 묻는다.


우리는 감동을 소비하던 시대로부터, 책임을 요구하는 시대로 진입했다. 감동은 일회적이고 휘발성이지만, 책임은 관계를 전제하고 지속을 요구한다. 대중의 윤리는 지금, 감정의 진정성이 아니라 구조의 정당성을 바라본다. '왜'보다 '어떻게'가 중요해진 시대.


당신은, 다시 설 자격이 있는가?




용서란 무엇인가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가? 아니다. 지금의 대중은 용서할 준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용서가 정당한지를 묻고 있을 뿐이다. 용서에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사과의 형식이 아니라, 책임의 형식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잘못이 남긴 상처를 지우려 하기보다, 함께 감당하려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함께 감당한다'는 말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죄하는 태도를 넘어서, 그 사과가 피해자 중심의 감각 위에서 설계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 문장보다 시간의 두께를 보고, 눈물보다 침묵의 지속을 본다. 용서란 감정을 일으키는 서사가 아니라, 관계를 복원하는 구조다.


그때서야 대중은 다시 열린다. 단지 감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진짜 윤리적 무게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서사에 감동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이제 대중은 서사를 통과한 사람만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정신이다. 우리는 더 이상 수동적인 관객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윤리적 문법을 다시 쓰고 있는 집단적 자아다.


기억하고, 판단하고, 묻는 감각. 누가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누가 다시 설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이 윤리의 흐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실력으로 가려지던 불의는 더 이상 숨지 못하고, 감정으로 포장된 전략은 이제 그 껍질을 벗는다. 우리는 더 이상 감동을 소비하지 않는다. 우리는 책임의 언어를 요구한다. 그것은 잔혹함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신중한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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