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오지심의 실종과 그 구조적 해체
한때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누군가는 길가에 무심코 떨어뜨린 쓰레기를 슬쩍 발끝으로 밀어 숨겼고, 누군가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법도 아니었고, 규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회를 움직이던 무형의 질서였다. 부끄러움, 혹은 수오지심(羞惡之心) —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마지막까지 품어야 할 윤리의 씨앗.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것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아니, 단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대 뒤로 퇴장당했으며, 이제는 제자리를 기억하는 이조차 드물다. 우리는 언제부터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이것은 어느 날 사라진 한 감정의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철학적, 인간학적 부검이다.
어쩌면 시작은 철학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맹자는 인간에게는 네 가지 단초가 있으며, 그중 하나가 수오지심이라 했다. 그것은 타인의 불의에 분노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기를 성찰하는 본능적 윤리 감정이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인간은 더 이상 그런 존재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계산 주체로 정의되었고, 감정은 오류의 원천이자 방해물로 치부되었다.
니체는 말한다. 도덕이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낸 억압의 장치이며, 수치심이란 바로 그 노예 도덕의 증거라고. 그리하여 인간은 점점 윤리적 감정을 폐기하고, 자율성과 효율성을 선택했다. 내면의 떨림보다 외적 평가가 중요해졌고, 진심보다는 퍼포먼스가 요구되었으며, 감정보다 브랜드 이미지가 더 큰 자산이 되었다. 수오지심은 이제 나의 성장을 방해하는 감정, 혹은 ‘시대에 맞지 않는 감정’으로 전락했다.
자본주의는 부끄러움을 계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감정을 계산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것이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감정일 경우, 시장은 그것을 외면하거나 제거한다. 시장 논리는 언제나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팔리는가?", "이것은 성장에 기여하는가?", "이것은 주목을 끄는가?"
여기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이 질문들에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것은 생산성을 증가시키지 않으며, 브랜드에 신뢰를 더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미지를 흐리게 만드는 정서적 잉여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감정’으로 재구성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기보다, 자신의 이미지를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보다 ‘나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고민하고, 자기 성찰은 ‘피드백’이라는 이름의 기능적 점검표로 대체된다. 자책은 자기파괴가 아니라, ‘자기계발의 연료’로 전환되며, 수오지심은 브랜드 구축을 방해하는 감정, 마케팅에 실패할 위험 요인으로 간주된다.
한때, 누군가를 속이거나 배신한 이들은 내면의 불편함에 시달렸다. 그 감정은 죄책감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보는 데서 오는 윤리적 고통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고통은 흔적만 남았고, 대신 다음의 공식이 작동한다.
“문제는 그 일이 옳았는가가 아니라, 그 일이 들켰는가이다.”
감정의 윤리성이 아니라, 노출 여부와 대처 전략이 중요한 사회. 부끄러움은 더 이상 도덕적 타락의 지표가 아니며, 브랜드 손상이나 평판 하락이라는 마케팅 실패의 증상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사과는 내면의 회복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절차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가 비윤리적이라는 선언보다 더 미묘하고 구조적인 문제다. 시장은 도덕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의 언어를 빌려 쓰면서 그것을 목적에 맞게 재조립한다. '신뢰', '진정성', '책임', '투명성' 같은 단어는 브랜드 슬로건으로 등장하지만, 그 안에 실린 감정의 무게는 기능적으로 조절되고, 정량적으로 기획된 감정일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윤리의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그 윤리를 이익에 종속된 감정 장치로 축소시키며 살아가고 있다.
정치와 권력은 수치를 감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정치의 풍경은 윤리 감정보다 전략적 유연성의 미덕을 우선시한다. 정치인은 실언을 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각종 추문에 휘말려도 사과하거나 물러서기보다는 오히려 그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기술을 숙련한다. 사퇴는 고백이 아니라 실패의 증거가 되었고, 반성은 진정성의 표현이 아니라 권력투쟁에서 밀렸음을 인정하는 제스처로 간주된다. 과거에는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 숙이는 것이 권위 회복의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이 권력 유지의 기술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정치인의 도덕성 저하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늘날 정치 시스템이 부끄러움을 감지하는 감정 구조 자체를 정치적 자산으로 인정하지 않는 구조라는 데에 본질이 있다. 수오지심—즉 자신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그릇되었음을 자각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능력—은 이 체계 안에서 비효율적 감정, 더 나아가 위험한 감정이 된다. 윤리는 더 이상 내면에서 우러나는 책임의 감정이 아니라, 외부의 여론을 계산하고 정파의 입지를 따져 배분하는 전술적 선택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과하는 정치는 ‘패배하는 정치’로, 성찰하는 정치는 ‘유약한 정치’로 규정되며 전시된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감정의 진정성이 아니라, 위기를 버티는 인내력, 사실을 전환하는 언술 능력, 상황을 뒤집는 해석 전략이다. 결과적으로 수오지심은 정치인 스스로가 느낄 필요도, 유권자가 기대할 이유도 없는 감정이 되었고, 그 빈자리는 이미지 관리, 위기 대응 매뉴얼, 전략적 침묵이 차지했다.
이것은 단순한 ‘몰염치한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치의 언어가 더 이상 윤리적 자아를 전제로 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권력은 감정 없는 언어로 움직이며, 수치는 더 이상 그 언어의 어휘로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는 부끄러움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오늘날 대중문화, 특히 예능이라는 장르 속에서 부끄러움은 진지한 감정이 아니라 웃음의 코드로 기능한다. 사람들은 방송에서 실수하고, 무너지고, 당황하며, 그 감정의 동요는 편집과 자막, 효과음과 함께 엔터테인먼트의 일부로 포장된다. 이러한 감정은 타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소비자의 웃음을 유도하는 기능적 장치로 전환된다.
즉, 부끄러움은 더 이상 존엄의 위기에서 발생하는 내면적 감정이 아니라, 재현 가능한 콘텐츠가 된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예능이나 대중문화 자체를 단순히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유쾌한 실수와 장난스러운 민망함은 인간 사회에서 건강한 해학의 일부일 수 있으며, 그런 감정의 공유는 공동체적 유대감과 자아 유연성을 길러주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웃음의 코드가 반복되며 점차 진지한 감정 전반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으로 확장될 때 발생한다. 웃음이 감정을 해소하는 통로가 아니라, 감정을 조롱하고 외면하는 방식으로 고착될 때, 우리는 웃으면서도 느끼지 않게 되는 존재로 이행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에서 우리는 점차 진지한 감정에 대한 냉소의 문법에 익숙해진다.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부끄러움, 수치심, 혹은 죄책감을 표현하면, “너무 오버한다”, “혼자 정의로운 척 한다”, “쟤는 왜 이렇게 진지해?”라는 반응이 뒤따른다. 감정을 진지하게 말하는 행위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수오지심이 사회적으로 억제되기 시작하는 문화적 조건이다.
수오지심은 본래 ‘진지함’과 깊게 연결된 감정이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과 가치 사이의 불일치를 감각하고, 그 불일치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성찰의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중문화는 이러한 감정의 과정을 지루하거나 불편한 것, 혹은 지나치게 민감한 것으로 처리한다.
그 결과, 감정의 진정성은 유치하거나 시대에 맞지 않는 감정 양식으로 여겨지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은 자기 연출된 감정, 편집 가능한 감정, 웃음을 유도하는 감정이다. 이러한 문화적 전환 속에서 우리는 점차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검열하며, ‘이 감정을 느껴도 되는가?’, ‘이건 너무 진지한가?’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진정한 수오지심의 발현은 사회적 부적절함으로 간주되기에, 우리는 그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껴도 드러낼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교육은 감정을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는 지식을 가르친다. 하지만 감정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독해력, 수리력, 논리력, 추리력에는 막대한 관심을 쏟지만, 감정에 대한 언어를 갖추는 법, 내면의 움직임을 해석하는 법,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법은 정규 교과에서 찾아볼 수 없다. 도덕 시간은 형식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시간조차 옳고 그름의 객관식 문제를 푸는 법을 가르칠 뿐,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미묘한 층위—예컨대 부끄러움, 죄책감, 당혹감, 연민—은 언어화되지 않은 채 지나간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감정을 느껴도 그것이 무엇인지, 왜 생기는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한 채 자란다. 수오지심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누군가를 해쳤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사실이 나에게 어떤 존재론적 불편함을 주는지 감각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이 마주하는 것은 성공/실패, 상위권/하위권, 이기는 자/지는 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뿐이다.
이 구도 속에서 감정은 집중력을 방해하는 요소, 성찰은 학습 효율을 떨어뜨리는 낭비, 공감은 너그러움이 아니라 약함으로 규정된다. 수오지심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감정처럼 느끼는 능력인데, 타인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비교되고 경쟁하는 존재로 배치되므로, 그 감정은 발화되기도 전에 제거되거나, 발화할 언어를 배우지 못한 채 억눌린다. 더구나, 수오지심은 본래 공동체 속에서 형성되는 감정이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부모가 슬퍼하겠지’, ‘친구가 나 때문에 상처받을 수도 있겠구나’와 같은 상상력이 윤리적 감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 교육은 공동체를 학습의 동반자가 아닌 성과의 경쟁자로 구성하고, 학생들은 서로를 ‘경쟁해야 할 타자’로 인식하며 성장한다.
그 결과, 수오지심은 단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성될 기회를 잃은 채 시작조차 하지 못한 감정이 된다. 그것은 결핍된 감정이 아니라, 제거된 감정이다. 교육은 감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발화를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 체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부끄러움 없는 세상은 인간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지금, 부끄러움이 사라진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도덕의 실종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인프라 자체가 차근차근 해체되어 온 구조적 붕괴의 결과다.
인간은 감정을 억압당했고
감정은 상품으로 재포장되었으며
윤리는 시스템에 위임되었고
성찰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육은 감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오지심이라는 가장 작지만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잃었다. 이 감정이 사라졌다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내면적으로 규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우리의 행동은 윤리적 자율성에 의해 조정되지 않고, 법과 감시, 알고리즘과 여론, 낙인과 처벌에 의해 조정된다. 내면은 침묵하고, 외부는 소음으로 넘친다. 윤리는 감정 없는 명령으로 바뀌고, 감정은 표현되지 않지만, 끊임없이 감시된다.
감정의 폐허에서
지금은 회복을 말할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이 결핍의 실체를 끝까지 직면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타인의 고통에도 무감각해진다. 그 무감각은 공동체의 해체, 신뢰의 부식, 정치의 추락, 그리고 삶의 공허로 이어진다.
“그래도 사람이면, 그건 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우리는 다시, 그 말을 들었던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그 말을 들을 줄 아는 귀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은 말보다 먼저, 침묵을 기록하는 에세이다. 사라진 감정을 기억하기 위한, 감정 없는 시대의 부끄러움 없는 연대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