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화된 연대, 잃어버린 책임의 감정
도시의 초입에서 불빛은 흔들린다. 옛 신화에서 불은 종종 도둑맞은 것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의 천벌을 무릅쓰고 인간에게 훔쳐준 그 불. 인간은 그 불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고, 언어를 세우고, 마침내 스스로를 타자로부터 구분 지어 주체로 거듭났다.
하지만 지금, 도시의 불은 간판 위에서 깜빡이고, 쇼윈도우에 반사되며, 인증샷을 위한 조명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타인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나를 돋보이게 하는 조명이다. 그리고 이 빛 아래에서, 우리는 ‘공동체’라는 말을 다시 꺼낸다. 감성 책방, 로컬 마켓, 동네 카페, 소셜 다이닝, 살롱 문화. 겉으로는 따뜻하고 정다우며 관계 중심적인 이 단어들은, 실제로는 다시금 시장의 언어로 구성된 상품목록처럼 펼쳐진다. 우리는 이 작은 공동체들을 소비하며 자신이 관계 안에 있다고 믿는다.
오늘날 ‘공동체적 경험’은 분절된 순간으로 소비된다. 작게는 동네 책방의 큐레이션, 함께 걷는 워크숍, 사적인 북클럽까지. 사람들은 그 속에서 일시적인 정서적 충족을 얻는다. 그러나 그 관계는 대개 지속되지 않는다. 정기 구독이 끝나면 모임도 끝나고, 책방의 콘셉트가 바뀌면 주인은 떠나며, 살롱의 기획이 실패하면 공간은 닫힌다. 그곳엔 시간이 쌓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말한다. “공동체를 경험했다”고.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정말 관계를 맺은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기획된 경험처럼 소비한 것인가? 소비된 공동체는 신뢰를 축적하지 않고,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며, 책임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 있는 장면’을 수집할 뿐이다.
윤리 없는 연대는 재현 가능하다
공동체란 단순히 사람들이 모인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일정 부분 책임진다는 윤리적 구조이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개인의 자유와 공동선을 결합하는 이상으로 공동체를 상정했고, 마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타자를 '그'가 아닌 '너'로 만나는 순간에만 진정한 관계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즉, 공동체란 타자를 단순한 객체가 아닌 윤리적 응답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주체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는 '지속성', '책임', '응답성'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그러나 현대의 소비자본주의는 이 세 요소를 빠르게 제거하거나, 피상화한다. 자본주의는 비판조차 흡수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가 '반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마저 마케팅 전략으로 삼는다고 말했고,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자본주의가 "그 외의 대안이 불가능하다는 감각"을 우리의 무의식에 심어놓는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곧,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든, 그것이 자본의 흐름 속에서 재현되는 한에서는 이미 상품으로 흡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공동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의 소규모 공동체 담론은 그 자체로 두 얼굴을 지닌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가는 작은 실천의 공간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기획된 감정, 연출된 만남, 반복 가능한 경험의 시나리오로 상품화되기도 한다.
이제 공동체란, ‘소비될 수 있을 정도로만 정감 있고, 책임지지 않을 만큼만 관계적인’ 모순적 구조가 되어간다. 이 공동체는 무언가를 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임’은 상품성에 치명적인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윤리를 회복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공동체란 무엇으로 구분될 수 있을까. 나는 그 기준이 다음 세 가지에 있다고 본다.
시간: 얼마나 지속되는가. 이벤트로 끝나지 않는 만남인가?
불편함: 관계의 과정에서 갈등을 감수할 의지가 있는가?
비가시성: 인증되지 않아도 존재하는 연결인가?
공동체는 결국 감정의 구조이다. 그것은 관계를 맺기 위해 감정적 비용을 지불하고, 신뢰가 쌓이기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그려내는 공동체는 감정의 유통만 있고, 감정의 책임은 없다. 그리고 바로 이 감정 없는 감정, 윤리 없는 연대가 우리를 더욱 피로하게 만든다.
소비하지 않는 것만이 저항일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이런 구조를 거부하며 '참여하지 않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완전한 이탈은 불가능하다. 소비하지 않는 것도 또 다른 이미지로 전환되는 시대다. 냉소는 자본주의가 가장 쉽게 무력화시키는 태도다. 중요한 것은 소비의 방식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태도다.
태도란, 불편을 감수하는 것. 돌아오지 않을 친절을 건네는 것.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지속하는 것. 인증되지 않아도 존재하는 관계를 믿는 것. 이러한 태도는 재현되지 않기에 상품화되기 어렵고, 그래서야말로 자본주의에 의해 회수되지 않는 윤리적 잔여로 남는다.
다시, 공동체를 말해야 할 시간
결국 공동체란 공간이 아니라 윤리이고, 상품이 아니라 시간이며, 브랜드가 아니라 감정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감각하는 능력, 불편을 감내하는 감정, 그리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의 구조다.
오늘도 도시는 반짝인다. 조명이 흔들리고, 음악이 흐르고, 우리는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이 불빛은 누구를 데우는가, 이 연결은 누구의 책임으로 작동하는가, 이 감정은 상품인가 관계인가? 이 질문을 잊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적 인간’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윤리는, 이 피로한 시대에 남겨진 마지막 연대의 조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