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볼까요, 아이슬란드? - 여행 8일 차
여행 8일 차, 이날의 일정은 다른 날과 비교해서 비교적 단순했다. 딘얀디폭포와 키르큐펠 딱 두 가지이다. 그만큼 이동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원래는 딘얀디를 보고 나오며 천연온천을 하고 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숙소에 포함된 아침식사가 8시부터 제공되는 것이 문제였다. 먹고 나면 빨라도 8시 30분, 느긋하게 식사하면 9시는 되어야 출발할 수 있을 터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 해 먹고 7시에 출발하려던 계획이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천연온천은 포기하기로 했다. 밥을 선택하고 온천을 포기한 우리는 이날 9시가 넘어 느긋하게 출발했다.
길은 멀고도 험했다. 웨스트 피오르 지역을 지나가는 도로이다 보니 경치는 정말 천혜의 절경이었다. 피오르 지역의 특성상 구불구불한 해안선이 이어지고 자연히 만과 반도가 연이어 나타났다. 어떤 곳에서는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길게 돌아가기도 하고 어떤 곳은 도로가 산을 넘어 해안선을 건너뛰고 다음 피오르로 바로 나가기도 했다. 길이 산을 넘어서 다음 피오르로 건너가는 곳에서 정점에 다다르면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든 피오르의 지형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의 파노라마는 말을 앗아가고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피오르의 해안선을 굽이굽이 돌아가자면 경치는 좋지만 이동거리가 한없이 길어지는 단점이 있다. 이쪽 해안과 건너편 해안을 가로지르는 다리을 만든다면 거리를 엄청나게 줄이게 되겠지만 이런 다리는 딘얀디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 개에 불과했다. 대신 새로운 다리를 하나 건설 중이긴 했다. 우리나라였다면 육지로 파고든 모든 침식해안 지형에 다리를 다 건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편의보다는 자연보호가 우선인 나라, 자연보호를 위해서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들의 사고방식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 국토가 거의 오지로 구성된 아이슬란드에서 오지를 이야기하는 게 어폐가 있지만 웨스트피오르는 정말 오지 같은 느낌이 든다. 가끔씩 나타나는 작은 마을조차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길 옆으로 펼쳐져 있는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고 있으면 항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인터스텔라 마지막 장면을 혹시 이곳에서 찍지 않았을까라는. 이런 곳을 지나가고 있는데 전방에서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은 흔히 1인 시위할 때 몸에 두르는 구호판 같이 생긴 것을 매고 있었는데 지나가며 보니 그건 히치하이킹을 위한 푯말이었다.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지점은 오랜만에 나타난 호텔과 주유소만 덩그러니 있는 곳에서 약간 더 올라선 곳이었다. 누군가 호텔까지 차를 태워줬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행색으로 보니 왠지 그곳까지 걸어온 듯했다.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봐서 그들은 딘얀디를 향해 가는 것이 분명한 듯했지만 아쉽게도 우리 차에도 그들을 태워줄 공간은 없었다.
길은 해안선을 따라가기도 하고 산을 넘어가기도 하다 보니 상당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 다다르니 자전거 여행자가 페달을 밝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지점은 우리에겐 내리막길, 그에겐 오르막길이었다. 힘겹게 오르막을 올라가고 있는 그를 보니 응원의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원래 내가 꿈꾸던 방식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너무 멋있어 보이고 그렇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게 살짝 부럽기까지 했다. 젊음의 힘과 자신감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에게 내가 응원하고 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와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여 보였다. 그런데 그와 멀어지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가 한 행동을 주먹감자를 먹인 걸로 착각하진 않았겠지 라는. 아마 그랬을 리는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달려 드디어 딘얀디 폭포에 도착을 했다. 딘얀디 폭포는 아이슬란드에서 꽤나 이름이 있는 유명한 관광지 이긴 하지만 굴포스나 데티포스처럼 아이슬란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아니다. 굴포스나 데티포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딘얀디를 모르는 사람은 그래도 꽤 있을 것이다. 아이슬란드 여행자 중 굴포스나 데티포스를 보지 않고 가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지만 딘얀디는 종종 사람들의 일정표에서 빠지기 일쑤다. 사실 여기를 보고 가는 사람보다 안 보고 가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딘얀디 폭포의 아름다움은 아이슬란드 대표선수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 딘얀디는 마치 숨겨진 무림의 절대 고수처럼 엄청난 아우라를 발산한다.
딘얀디가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크기이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딘얀디는 예뻐 보였지만 규모가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조금 아담한 폭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본 딘얀디는 엄청난 규모로 그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딘얀디는 폭포가 아래로 떨어지며 폭이 넓어지는 형태여서 마치 여성의 주름치마처럼 보인다. 대체로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그냥 하나의 몸체 같은 느낌인데 딘얀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물방울 하나하나가 제각기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마치 옥구슬이 굴러 떨어지는 것 같다는 다소 진부한 표현이 딱 들어맞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폭포의 전체 모습뿐만 아니라 디테일한 물방울의 모습도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 딘얀디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주변 풍광이다. 딘얀디가 워낙 아름다워서 넋 놓고 바라보다가 뒤로 돌아서면 그림 같은 피오르 해안이 펼쳐진다.
그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는 광활한 대자연이 딘얀디 폭포를 감싸고 있다. 텔레비전으로 딘얀디를 보았을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주변의 풍광은 딘얀디의 매력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경험해 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즐거움이다. 딘얀디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주변에 연계해서 갈만한 다른 관광지도 마땅치 않다 보니 여행일정을 짜면서 넣을지 말지 수도 없이 고민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누군가 같은 이유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곳은 무조건 가봐야 한다. 그 모든 수고로움과 고생을 보상해 줄 아름다운 보물이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 여행자를 만나면 이번에는 큰소리로 응원해 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분명 외길이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이 그 먼 거리를 벌써 지나가진 않았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대신 히치 하이킹을 시도하던 그 사람들은 다시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본 순간 뭔가 모를 경외심 같은 것이 들었다. 사실 그들은 구도자들은 아닐 것이다. 단순한 여행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왜 걷고 있었을까? 단지 돈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그들의 내밀한 사연을 내가 알 길은 없다. 그렇지만 그들에게서는 무언가 진리와 아름다움을 향한 순수한 열정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고귀한 정신으로 승화되는 성스러운 인간의 본질을 향한 탐구의 여정을 그들은 걷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들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이제 우리의 길은 키르큐펠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