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추구미, J형 인간

by 여름비 CLIO

내 친구들 사이에서 밈이 된 말들이 있는데, MBTI를 가지고 하는 말이다. 감성적 위로보다는 현실적 해결방안을 내놓으면 ’T세요?‘라거나, 낯을 가린다고 하면 ‘I이시군요!’ 라던가.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펼쳐놓으면 ’N이시구나’, 이런 상상력에 진저리를 치면 ‘힘들어하는 거보니 S?‘ 하는 식의 농담이다. 사람의 성격이 16가지로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이 말이 위험할 수는 있지만, 친한 친구들 사이라서 MBTI를 가볍게 소비하고 있다. 이런 MBTI 농담들 중에 내가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J에요?’다. 모임에서 늘 미리 준비하고 계획하다 보니, 친구들이 농담삼아 놀린다고 하는 말이다. 나는 성격이 급하다. 그래서 친구들의 느긋함을 견디지 못하고 미리 이런저런 제안을 하는 것인데, ‘역시 J라서 준비성이 철저하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근데 정말로 나는 J 성향이 맞다. 여러 번 검사를 해도, 다른 종류의 검사를 해도 J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나는 규칙적으로 사는 삶, 루틴을 만들고, 지키는 삶을 지향한다. 이른바 추구미. 그럼 어떤 것이 추구미 J인가. 목표한 일이 있으면 목표까지 가는 길을 잘게 나누어 차례차례 순서를 맞춰 착착착 완료하려고 한다.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 종적인 것이라면, 매일매일은 여러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조각들을 목표별로 하나씩 해나가는 횡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일은 여러 다양한 목표들의 다양한 조각을 어제의 시간 위에 쌓는다. 그래서 시간대별, 상황별 해야 할 일을 정해둔다. 간단히 매일의 루틴을 공개하자면, 아침에 일어나서는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팥을 따뜻하게 데워서 안구 마사지를 해준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작은 수첩에 적어본다. 이후엔 간단한 운동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는데, 월요일과 목요일은 새벽요가를 하고, 다른 날에는 실내사이클을 타거나 집안일을 한다. 그러고 나서는 샤워를 하고 식사는 정해진 것을 먹고,, 벌써부터 숨 막힐 수도 있겠는데, 이런 소소한 규칙들은 저녁까지 빼곡하게 정해져 있다. 내 핸드폰에는 나의 규칙적인 일정을 알려주는 알람이 설정되어 있는데, 몇 개냐고 하면 직장에 있는 시간만 빼고 12개가 켜져 있다(어디선가 탄식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이겠지).


그럼 나는 왜 이런 생활을 나의 추구미로 잡았을까. 나는 내가 모르는 상황, 정확히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일들에 규칙을 만들고, 루틴화 시켜서 그걸 차례대로 해가는 것을 좋아하고, 마음이 편하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있었으면 좋겠고 익숙하면 좋겠다.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에는 많이 긴장한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질까 봐 온몸에 힘을 꽉 주고 모든 것을 예민하게 주시하며 상황에 임한다. 특히 내가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있어서는 더 많이 긴장한다. 낯선 환경에 놓이거나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된다면 거짓말 조금 보태 한 백 번쯤은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것 같다.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이 긴장은 강의를 하러 갈 때가 최고조인데,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강의 한 번 하는 데에 대본을 한 스무 번쯤 고치고, 그 대본이 내 것이 될 때까지 몇 날 며칠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2시간짜리 강의 하나 준비하는데, 일주일도 넘게 걸리니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든다. 이 일을 업으로 삼기엔 참으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 일이 너무 재밌는 걸 어떻게 하겠나. 그래서 좋아하는 일에 에너지를 많이 쓰고 일상적인 일들엔 에너지를 줄이기로 한 것이다.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삶을 단순화시키고, 저기에 저항하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일상에 루틴을 만들어 통제하고 지키려고 한다.


이 루틴이 무너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지름길이라서 빨리 도착하겠구나 생각하고 좋다고 가고 있는데,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더 많은 시간이 들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랄까. 또 이 루틴을 세운 건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세운 규칙들이니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나는 내가 만든 루틴을 나는 다 지키고 해내는가?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면 다 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매일 지켜야 할 루틴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알람이 12개라고(알람을 맞출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글로 쓰고 보니 어후.. 징글징글하다).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고, 각 일마다 투입되는 최소한의 물리적 시간도 있으니 할 수 있는 일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고, 또 예상외의 일들도 일어나는데, 무균실 속에 오롯이 혼자 사는 것처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깜량으로도 못할 일들도 여럿 적어둔다. 내 능력상 이틀 걸릴 일을 반나절로 계획한다던지 말이다. 그래놓고 나는 나를 탓한다. 이것도 못 지키면서 무슨 일을 하겠다고 말이야… 하면서.


이렇게 못 지킬 걸 알면서 나는 왜 이렇게 무리한 계획을 세우고, 그래서 못 지키고, 또 결국엔 나 스스로를 비난하게 되는 걸까.. 상담 시간에도 이것에 대해서 상담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나 스스로를 굉장히 게으른 사람,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자 상담사 선생님은 나에게 계획한 것 중 몇 퍼센트 정도를 해내냐고 물었다. 나는 70~80% 정도를 해내는데, 100%를 다 완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게을러서인 것 같고, 또 완수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하루 12개의 알람을 켜두는 건 욕심만 많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상담사 선생님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 것을 스스로 계획하고, 그중 70-80%를 수행해 내면 대단한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상담사 선생님 말에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아, 정말 그러하네. 나는 내가 세운 계획을 70-80%나 해내고 있네. 그것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고 있었는데. 나는 무척 성실하고 착실한 사람이네. 내가 나를 비난하게 된 건, 내가 계획을 세우는 이유를 잊은 탓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어서, 중요치 않은 것 혹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서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루틴을 만들었던 것인데 말이다. 에너지를 아끼자고 한 일이 에너지를 갉아먹었다. 수단이 목적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로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나를 믿지 못해서 계획을 세우고 또 루틴을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낯선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잘 해내지 못할 거라는 의심이 문제다. 처음 해보는 거니 나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긴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긴장을 하니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되고, 그래서 에너지를 아끼려고 세운 루틴을 또 못 지킨다고 나를 닦달하며 다그치느라 에너지를 또 쓰고. 어쩐지 사는 게 피곤하더라니.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 있나. 그런데 상담을 하고 깨달았다고 해서 바로 고쳐지는 건 아니다. 안다고 바로 실천하면 득도한 성인이고 부처지. 나는 한낱 범상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여전히 안달복달 하며 나를 다그치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전보다는 나를 덜 다그친다. 낯선 곳에서 긴장하는 나를 좀 더 믿어주려고 한다.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충분히 잘 해낼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틴화 하는 삶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P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전보다는 나에게 관대하게 계획을 짜는 것이다. 여유 있고 관대한 J가 되는 것, 이것이 나의 새로운 추구미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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