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 낼 수 없는 감정, 살아낸 말에 대하여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나는 많은 걸 너무 일찍부터 시작해야 했다.
아무도 깨우지 않는 새벽, 스스로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겨우 말린 한 벌밖에 없는 교복을 다리미로 말려 입었다.
아침은 3일째 먹던 누렇게 변한 밥과 김치로 급히 끼니를 해결했고,
온 동네에 울릴 만큼 낡은 대문을 ‘꽝’ 닫으며 집을 나서는 게 그 시절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어느 시기부터,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겉으로는 늘 밝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합창부 활동도 오래 했고, 지휘를 맡아 칭찬도 자주 들었다.
분명 나는, 누구보다 명랑한 아이였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다정한 줄 알았던 친구들이 내 말투를 흉내 내고,
내가 무심코 꽂은 머리핀, 가르마의 방향, 말버릇까지 따라 하면서
그 모든 걸 “자기가 먼저 했다”라고 말할 때,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을 삼켜야 했다.
그땐 몰랐다.
그게 ‘질투’라는 감정이라는 걸.
나는 그냥, 한부모 가정이고 가난해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만 생각했다.
늘 내가 뭔가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그 일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교묘해졌다.
직장에서도 내 스타일, 말투, 내가 즐겨 쓰는 단어들을 따라 하는 이들이 있었고,
어떤 날은 내 표정까지 흉내 내는 사람도 있었다.
말로 표현하긴 어려운 찝찝함 속에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택했다.
억울함을 꺼내 보일 자격도 없다고 믿었고,
변명하는 내가 더 초라해질까 봐, 그냥 조용히 넘겼다.
나 하나쯤 조용히 참으면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다.
인사 잘하고 웃으며 다가가면,
그들은 언제나 “네” 하고 조용히 선을 그었다.
그들의 말투는 차가웠고, 눈빛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그 속에서, 애쓰는 건 늘 나였다.
나는 나를 지우고, 남에게 맞추듯 살았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시간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미워하게 됐다.
그때였을 거다. 딸아이가 말투도 표정도 나를 꼭 빼닮아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우면서도, 어딘가 가슴이 서늘해졌다.
내가 묵인하고 참아오던 삶이,
그 아이의 말투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부정하고 싶을 만큼 미웠다.
어느 날 딸이 말했다.
“엄마, 애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걔, 착한 애. 욕 안 쓰는 애.”
그리고는 덧붙였다.
“그래서 신기하대.”
나는 웃지 못했다.
그게 너무 낯익고, 너무 아팠다.
그건 내가 어릴 때 듣던 말이기도 했다.
딸도 남들이 정해준 프레임에 자기를 끼워 맞추듯 살고 있었다.
더 착해야 하고, 더 조용해야 하고, 더 괜찮은 아이처럼 보여야 한다고 믿는 모습.
그 아이에게 내 삶의 침묵을 물려주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나는 내 딸을 통해,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임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혼자였다면 그저 참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아이가 내 감정의 흔적을 닮아가는 걸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절 나를 따라 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때는 몰랐지만, 어쩌면 그들도 날 부러워했던 게 아닐까.
돌이켜 보면, 내 어린 시절이 그렇게 초라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내가 밝게 살았던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삶을 밝힐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어쩌면 그때의 나는, 나 스스로를 밝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모습이 내게는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누군가에게는 빛나 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들이 마음속에 쌓여가던 중,
어느 날 문득,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글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문장이었다.
“너, 참 많이 참았구나.”
그 문장을 쓰는 데에도 몇 년이 걸렸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써 내려간 문장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내 안에서 되찾은 감정의 권리였다는 걸.
누구는 그 말투를 흉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안에 깃든 시간과 눈물까지는 흉내 낼 수 없다.
그건 내 것이었다.
나는 내 삶을 빛낸 것도,
그늘지게 한 것도 결국 나였다는 걸 이제는 안다.
누군가 내 말투를 흉내 내고,
내 행동을 따라 하고,
내 존재를 가볍게 소비했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긴 시간과 감정, 고통과 회복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믿는다.
감정에도, 삶에도, 말에도 저작권이 있다.
누가 대신 쓸 수 없는 말.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문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나는 그걸 지키기 위해,
이제야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야, 쓴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내 딸에게도,
지워지지 않아야 할 감정의 권리이며,
더는 누구도 침묵시키지 못할
살아낸 사람만의 말이다.
말보다 오래 남는 감정을 씁니다.
각기 다른 시선에서, 당신의 마음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이야기로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