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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한다는 건, 버릴 수 없다는 것

내 습관을 억누르는 것- 도망치고 싶을 때 모든 걸 버리던

by 라화랑
내가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을 때에는 어떡할까.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않아야 할까.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에는 과감히 말하고, 멈춤을 요청하면 된다고 작년에 배웠다. 작년엔은 삶이 버거웠다면- 올 해에는 내가 버겁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이 눈에 아른거리고 내가 이룬 것들은 하잘것 없고.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아니고 싶은데, 나여서 또 실행하지 못하는 일상에 미쳐버릴 것만 같다. 안다. 자기혐오는 세상에 화를 못 내는 나같은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걸. 그리하여 우울증이건 불안장애건 다시 불러내는 흑마법과 같다는 걸. 하지만 어떡해. 나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지만서도- 나를 벗어버리고 싶은 욕망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들을 오늘은 하나씩 풀어내야겠다.

삶에서 멀어지기 전에.


직장일로 세간이 뜨겁다. 정치적 공약으로 내건 누군가의 단호한 의지는 나를 띵하게 만들었다. 취업 사기를 당한 기분이다. 연봉과 주휴수당, 휴가를 확인하고 인생을 걸어 시험에 합격했는데 (물론 시험을 볼 때에는 삶을 건다는 비장함까지는 없었지만) 막상 회사에 들어오고 나니 "오, 작년까지는 그랬는데 이제부터 너네 휴가 없앨거야. 근데 월급은 동결이고, 너네 원래 놀잖아.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일이나 더 해. 너네 원래 사명감으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잖아. 쓰읍- 어딜 개기고 들어? 너네가 희생하면 나라 전체가 행복해져."

라는 말로 나를 압박하는 상황이랄까.


일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직장에 뒤통수를 맞아도 싸다는 마음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걸까. 그럼 나는 다시금 짚어보는 것이다. 왜 나는 스물 몇 적에 이 직업의 미래 가치 따위 생각지 않고서 현재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열심히 노력하였는가. 나의 직업 안정성을 박탈당했다. 나는 미래가 걱정된다. 앞으로 내 10년 뒤가 지금보다 확실히 나빠지겠다는 불안이 덮쳐온다. 내 직장일을 운운하는 대선 후보는 인기가 제일 많기 때문이다. 해당 사안에 대해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마음이 더 아파온다. 사람을 찌르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들이 많다. 가령, '응 너 아니어도 그 일 할 사람 많음 싫으면 니가 나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라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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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면, 반지를 본다. 내 왼손 약지에 끼워진 동그란 애. 모든 걸 놓고 도망치고만 싶다. 하지만 얘를 만지면서 나는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나는 미래를 이 사람과 함께할 거야. 그러려면 직업은 가져야겠지. 쉽사리 내 마음대로 냅다 때려쳐 버려선 안 돼." 라면서. 내 불안함은 이직을 해야 하냐는 불씨를 붙이고, 타오르는 횃불 앞에서 나는 이내 열기에 얼굴이 뜨거워진다. 답답하다.

[내가 혼자였다면-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면 나만 생각하고 모든 걸 결정내려도 됐을텐데. 2년이건 3년이건 골방에 틀어박혀 새로운 직업을 준비할 공부에 매진할 수 있을텐데. ]

옛날부터 습관처럼 써먹던 '버리기'가 발현되는 순간이다. 내가 힘들고 지쳐버릴 때 나는 친구와 가족을 제일 먼저 버렸다. 모든 관계를 끊어먹고 내 안으로 파고들어간다. 꽁꽁 숨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게끔 방어막을 세운다. 그 버릇이 안 고쳐지고 누군가와 평생 함께하겠다는 내 마음에 시험지를 건넨다.

"너, 이래도 결혼이라는 걸 할 거야?"라며.



결혼을 올 해 결심하지 않았다면 나는 일 년동안 해외에서 일할 계획을 잡았을 것이다. 올 한 해 영어 시험을 통과하고 필요한 다른 자격증을 따 내년즈음 내가 좋아하는 동남아시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했겠지. 아니면 벌써 직장을 때려치웠을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지속적으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돈 벌이라면- 새로운 돈 벌이 수단을 찾아야겠다면서. 그렇게 자꾸 생각이 생각을 물고 새로운 미래를 그렸다 지워낼수록, 나는 화가 차올랐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그걸 옆 사람이 함께하지 않았을 때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대체 왜 하는 거야? 함께 평생 하겠다고 약속했던 마음은 그렇게 가냘프고 어설픈 거였니? 너, 참 연약하고 별로인 여자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내 자신감은 '솔로인 여성'일 때에만 나오는 것이었을까. 나는 내 자격지심 혹은 편견에 깜짝 놀랐다. '둘이 된 내가 혼자인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다.'니. 이 편견은 대체 어디서 뿌리내린 건지 원인을 찾으러 나는 돋보기를 들고 이리저리 마음밭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파헤쳐지는 내 가슴에는 잦은 삽질로 큰 구멍이 생겨 무척이나 따갑고 아팠다. 그리고 결국 찾아낸 곳에는, 수 많은 지렁이들이 있었다. 이름하여 '어른들 잔소리 지렁이.'

- 혼자 살지. 결혼 뭐 하러 하냐. 는 아빠의 말도 안 되는 대답에서부터

- 돈도 없는데 네가 그 전공의 대학에 가 주어 고맙다. 는 스무 살 나에게 건넨 아빠의 술주정과

- 결혼하면 책임질 게 많아져서 머리만 아프다. 는 주변 아줌마들의 농담들,

- 아무도 없을 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라는 엄마의 말까지.



누구도 내게 함께하며 삶에 도전하는 법을 가르쳐주질 않았다. 그저 불쾌하고 불합리한 사회에 참고, 견디는 자세만 보여줬을 뿐. 그러니 난 배운 게 없어 두려운 것이다. 삼십 대의 여자가, 결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을 해서, 20대만 받는 사회에 새로운 신입으로 어떤 직업을 새로 가질 수 있을까. 하고.


그리고 결국 인정했다. 나는 사랑하기로 결심해 옆에 함께하는 사람과 지내는 모든 시간이 아깝다고 잘못 생각한 적이 있다고. 나를 위해 쓰는 취미 시간도 사치같았다고. 그래서 요새 글을 쓰기도 싫었다고. 이건 다 나의 자격지심과 요상한 편견 때문이었다고. '누군가와 함께하는 나는, 나를 위해 시간을 빼는 나는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편견. 오늘을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성공이 없을 리가. 남들이 판단하는 성공이 아닐 뿐. 어차피 내 삶의 성공을 정하는 건, 나 하난데 말이지.


깜빡 속을 뻔 했지 뭐람, 나는 저런 세간의 말과 판단들에 휘둘리지 않고 삶을 살아내기로 했으면서. 죽지 않고 삶을 살기로 결정한 사람이 왜 자꾸 남들의 눈초리에 웅크러져 있는 건지, 원! 30대에 내가 도전해서 아파트 당장 못 사면 어때- 생활비 좀 쪼들리면 어때- 저축 몇 년간 없어지면 뭐 어때- 겁나서 스스로를 망치게 두며 근근이 생을 이어가는 것 보다야 훨씬 나을 텐데 뭐.


결심했다. 이 사람과 보란 듯이 함께 살면서 행복해져 볼 거라고. 나도 나를 들들 볶지 않는 어느 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고. 그러니 어제까지 독립 출판을 위해 썼던 모든 내 시간들은 헛되지 않았던 거라고. 결혼식 준비를 위해 어떤 선물이 좋을지 골랐던 우리의 대화들은 쓸데없고 아까운 시간이 아니었다고. 왼손 약지를 다시 본다. 나는 하루에 네다섯 번씩 반지를 쓰다듬는다. 화날 때, 답답할 때, 속상할 때, 즐거울 때. 사랑의 책임이 두려워 도망치고자 했던 나는 이제 삶의 고난을 함께 서핑해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럼 그는 대답하겠지.

"기꺼이, 당연히. 널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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