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역꾸역 ktx에 타는 내 모습이 어떻냐면, 글쎄 눈부시게 예쁘더라고
형식을 방패로 삼아 마음을 표현할 때가 있다. ‘옛날부터 으레 해 왔으니까 너도…’라는 말을 싫어했던 나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렇게 해야 하니까]에 포장된 속 알맹이가 낭만일 수도 있음을. 이건 어버이날에 겪은 내 심경의 변화. ‘부모님 사랑합니다!’를 주문처럼 외우고 시작함.
연휴 이틀 뒤 어버이날의 존재는 서울에 떨어져 사는 자식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내 연휴를 집에 다녀오는 것으로 바쳐야 할지, 연휴가 끝난 뒤 주말에 쉬지 않고 집에 가 피곤한 채로 부모님을 뵈어야 할지. 나는 후자가 당첨됐다. 연휴에 남자친구 부모님께 첫 인사를 드리러 갔기 때문이다.
내가 산골짜기에 콕 박힌 우리 집에 멀리 내려가야 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금요일은 회사에서 일년에 한 번씩 있는 큰 행삿날이었다. 평소보다 많은 힘을 들여 오후까지 살아내야 한단 뜻이다. 공교롭게도 일교차로 인한 감기까지 스멀스멀 목을 타고 기어들어오니, 나는 서울역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내 옆을 쌩쌩 지나치며 와글와글 떠들어대는데, 미치겠더라고. 자리에 주저앉아 눈꺼풀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만 싶었다. 피곤함이 도를 넘어서면 나는 아득히 저 멀리서 누군가가 부르는 것 마냥 졸리다.
그럼 나는 이 상황을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꼭 이 날짜에 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지, 집까지 가는데 얼마나 남았지 등등. 결국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어깨를 으쓱 하고는 푹 내린다.
‘한국에서 이 집의 막내딸로 태어난 게 죄다, 죄야. 어버이날 같은 거 안 챙기는 외국이면 얼마나 좋아. 아님 나 말고 이벤트를 해 줄 수 있는 형제자매가 있는 다른 집에 태어나던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피곤하니까 눈 딱 감고 그냥 어버이날이건 뭐건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지.’
안다. 얼마나 무례하고 개차반인지. 하지만 생각은 내 마음대로 선을 넘실넘실 넘나들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인 걸? 실제로 나는 언니와 오빠에게 이체받은 돈을 atm기에서 뽑아 돈이 훅 튀어나오는 상자에 예쁘게 포장해 서울역에서 집에 가는 ktx를 기다리는 사람인 걸. 그러니 이 정도 불효막심한 생각정도는 담아도 되는 거라고 스스로를 향해 고해성사도 마쳤다.
아무튼 누군가 시키지도 않은 일로 혼자 냅다 화가 난 채로, 돈만 주는 자식이 되지 않기 위해 꽃집을 찾아갔다. 역사 내의 꽃집은 내가 알고 있는 상식선의 가격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열심히 찾아낸 가까운 곳으로 무거운 내 짐과 함께 어버이날이 나를 질질 끌었다. 이건 분명 내가 간 게 아니고 ‘어버이날’이라는 공기가 날 떠민게 확실하다. 역사에 있는 대부분의 내 또래 사람들이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니, 빨간 꽃이니 들고 있었단 말이다.
마트 앞에 자리잡은 꽃집에는 넉살 좋은 남자 사장님이 계셨다. 나는 꽃집 웨이팅이라는 걸 처음 해봤다. 내 또래의 여자들이 저가 준비한 선물에 꼭 맞는 꽃을 포장하고 싶어 사장님께 이것저것 물어봐가며 꽃다발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중이더라고. 내 차례가 될 때까지 기차에 늦지 않고 탈 수 있을까, 시계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더니 사장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미리 만들어진 꽃다발은 바로 드릴 수 있으니 언제든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편히 말씀해 주세요.”
뭐 그렇게 창의적으로 엄마 마음에 들 색까지 정해서 꽃다발까지 세심하게 챙길 여력이 없는 나는 누가봐도 카네이션처럼 생긴 새빨간 더미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것 좀 바로 가져갈 수 있냐 했더니 앞 손님 것을 잠시 양해해달라고 말씀하시고는 금세 내 것을 먼저 줄기를 잘라 물통을 달아주셨다. 그리고 지친 내 표정을 보면서도 방글방글 웃으며 하시는 말씀.
“이건 제가 그냥 드리고 싶어서 드리려고요. 이게, 사랑한다는 말을 저는 잘 못하는데요. 이럴 때 글씨로라도 꽃 드리면서 같이 말씀하시면 좋더라고요. 그런 의미로, 이거 딱 드리고서 말씀해보시면 좋을 거예요. 아핫, 하하핫, 좋은 하루 되세요.”
그가 내 몫의 꽃다발에 턱 붙여준 건 [사랑합니다.]라는 글귀가 누군가 쓴 것 처럼 프린트 된, 손바닥만 한 종이 카드였다.
사장님의 친절이 일시적인 비타민제 역할을 했는지, 나는 기어코 길바닥에 주저앉지 않고 집에 가는 기차까지 무사히 타기에 성공했다. 시간이 애매해 그 와중에 프레즐까지 야무지게 살 생각도 했다. 이미 양손 가득한 짐들을 어거지로 껴안고 함께 마실 콜라까지 자판기에서 빼냈다. 자리에 앉아 배고픈 채로 크림치즈 가득한 빵을 우적우적 씹으며 탄산에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창에 비친 나를 봤다. 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양 볼 빵빵히 음식을 집어넣는 30대 여자의 앞에는
카네이션 꽃다발과 가짜 오만원 장난감,
그리고 현금 몇십만원이 좁은 기차 테이블에 놓여져 있어서.
그게 다름 아닌 나라서.
이 상황이 이상하게도 불쾌하지는 않아서.
‘사랑합니다.’라고 반듯이 적힌 글자를 직접 전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피곤으로 뒤덮인 몸을 채근했는지, 오늘따라 회사는 뭐 그렇게 할 일이 많아 다리까지 부었는지, 어제부터 먹은 감기약은 왜 아직까지도 내 목을 낫게 해주질 않는지 엄마에게 꼭 이야기하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꽃집 아저씨의 말마따나 나는 분명 ‘어버이날 축하한다, 고맙다, 사랑하니 오래오래 건강히 살아라.’는 말은 낯간지러워 직접 못할 게 분명한- 강원도의 피가 흐르는 무뚝뚝한 딸이다.
그저 내밀어야겠지. ‘이거 사느라 진짜 힘들었어.’라면서, 엄마에게 주는 게 분명한 꽃다발을.
알아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