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도, 사랑하는 사람도, 취미도 있는데 불행하다는 게 잘못같다
슬프고 즐거운 일이 없어서 글을 못 썼다. 안 쓴게 결코 아니다. 매일 퇴근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긴 했었단 말이다.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는다. “오늘은 어땠어?” 남자친구와 매일 밤 서로 묻던 질문에 언제부턴가 내 답은 같았다. “어, 아, 어…. 그냥 그랬어.” 안되겠다 싶어 다시금 상담 선생님을 뵈러 갔다.
하루가 어떻냐고, 상담 선생님의 탐구는 일상부터였다. 나는 ‘누구나 그렇듯 으레 다 비슷하게 산다는 게 내 머릿속에 들어앉을수록 잘못되었다는 신호가 온다.’며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산다고 답했다. 출근을 하고, 집에 가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취미 생활이랍시고 써지지 않는 글을 고민하다가, 피곤함에 절어 잠이 들어버린다고.
[그렇지만 나는 좀 더 다른 삶을 살 줄 알았는데.]
마음 속의 나는 내게 실망을 내리 하는 중이었겠다고, 이제야 얼핏 깨닫는다. 상담실에서 이야기할 때만 해도 눈치채질 못했다. 아무튼, 내 눈 앞에 지나치는 모든 생물체에게서 내게 없는 점만 쏙쏙 찾아내는 병이 심각해졌다. ‘불행병’. 누군가에게는 이런 내가 멍청해 보일거란 걸 안다. 누군가는 그만큼도 못 가지는 사람이 있는데 기만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내가 재수없어 보이겠지. 그래도 어쩌겠냐고.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은데 뭐 어쩌랴. 인생에 큰 굴곡 없는 지금 이 시기에도 나는 우울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스스로 가진 건 티끌같아 부끄러워하고, 못 가진 걸 부러워하며, 왜 못 가졌는지 한탄하는 지병이 도졌다. 이런 사람에게 [지금까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라.]라던지 [명상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해져라.]같은 아가 똥 집어던질 소리는 절대로 하면 안 된다. 모욕이다. 결투 신청인가 싶다.
하얀 종이와 오일 파스텔. 상담 선생님은 내게 미술 도구들을 내밀었다. “하고 싶은 걸 여기에 그려봐요. 지금 느껴지는 어떤 감정이라도 좋아요. 꼭 형태를 그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선생님, 저는 지금 그림같은 걸 그리고 싶지 않은데요. 라고 답할까 했지만 이 시간은 엄청난 상담 경력을 지닌 선생님과 1시간에 비싼 돈을 들여가며 마련한 것임을 떠올리고는 일단 아무 색이라도 들기로 했다. 나는 회색으로 하릴없이 빗금을 그었다. 왼쪽 모서리에서 오른쪽 아래 모서리로, 중간에서 끝으로, 오늘은 이유없이 그 색이 예뻐보였다. 선생님은 다 끝나고 물으시기를,
“하면서 어떠셨어요?”
나는 답했다. 사실 잘 모르겠다고. 그냥, 이 시간이 참 어색한 건 느꼈다고. 내가 혹시 회색을 택한 것이, 혹은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고 빗금을 그은 것이 어떤 해석이 들어가는 것인가 경계했다고. 왜 그런 것들. 나무를 중앙에 그리면 가족간 불화를 상징한다 같은 해석론적 미술 치료 있잖는가.
난 그냥 오일 파스텔 중에서 회색이 제일 예뻐보여서 고른 건데.
난 그냥 뭔가 그릴 능력이 없어서 빗금만 쳐댄 건데.
난 그냥 하라고 해서 한 건데.
난 그냥 별 뜻 없는데.
난 그냥
역시 보법이 다른 우리 선생님. 나에게 “어색한 걸 느낀 건 참 잘한 거다.”며 앞으로도 이렇게 무언가 하나씩 함께 다양한 걸 하자고 제안하셨다. 무언가를 잘 느끼고 거기서 하고 싶은 게 생기던 네 눈이 참 반짝이고 아름다웠다며. [그 눈을 다시 한 번 저는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이제 안 예쁜 것만 같은데요.] 스스로 포기하고자 할 때, 진부하지만 나는 이런 말이 듣고 싶었나 보다.
“아니야, 넌 여전히 예뻐.”
상담을 마치고 나오자 데스크에 앉아있던 또 다른 상담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활짝 웃어주었다. 오랜만에 본다, 왜 컴퓨터 앞에 있는 모습이 근무하는 내 거북이 모습과 같냐며 놀리자 “뭐 이렇게 귀엽게 입고 왔대.”라고 하시더라고. 문을 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시금 말하지만, 옷이 아니라 입은 사람이 귀여워서 그런거야.”
뻔뻔하게 입이 잘 돌아가는 걸 보니, 기분이 좀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난 그냥, 그렇다고.
별 일 아니라서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중에 별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적는 오늘의 상담.
어쨌거나 뭐라도 끝까지 써낸 게 기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