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홍시의 추억
추석 명절이 다가왔다고 고향 한국은 부산한가 봅니다. 멀리 이국 땅, 영국에서는 가끔 추석인 것 자체를 잊을 만큼 아무 의미가 없는 날이지만, 올해는 동생 생일이 추석 하루 전날이라 정확한 날짜를 알게 되었습니다. 머리로는 명절을 인지했지만, 얼마나 바쁜 시즌인지 깜빡 잊은 나는 생일 선물을 이틀 전에 주문을 합니다. 당연히 배달은커녕 주문 접수도 되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평소에 잘 먹지 않던 감이 먹고 싶습니다. 지역 아시안 마트에 가봅니다. 중국산 단감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다행입니다. 평소라면 사지 않을 비싼 가격이지만 명절이니까 한 봉지 집어 옵니다. 깎아서 먹어보는데, 한 입 베어 물고 보고 알았습니다. 내가 먹고 싶은 감은 단감이 아닌 몰캉하고 달달한 홍시였다는 것을.
“네 어미가 작년에 저 나무 밑에서 그렇게 홍시를 맛있게 먹었었는데... 그때 좀 더 먹일 것을... 웃는 모습이 꽃같이 예뻤다 내 새끼.”
할머니의 처연한 그 말씀과 함께 엄마 잃고 맞았던 허전했던 첫 추석을 기억합니다.
“태어난 달과 같은 달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제 명대로 살다가 갔다는 말 인기라. 지금은 아마 훨훨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안다.”
할머니의 시선은 집 뒤 둔덕 감나무를 향하고 계셨지만, 그 너머를 보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개천절이셨던 엄마 생신이면 항상 가을 과일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생일날이 추석과 겹치는 해도 종종 있었습니다. 어린 나는 그저 맛난 전이랑 나물 먹고, 떡 오물거리면서 놀러 다니는 추석이 참 좋았습니다. 엄마는 집안 장손 며느리였기에 그즈음이면 항상 제사상 준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잘 살던 집의 가세가 기울면 압니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야속한지요. 집안이 사업으로 번창할 때는 명절 선물들이며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었습니다. 집안 사업이 어려워지자 집안 식구끼리 마저도 추석 명절 축언을 나누기보다는 누가 잘했다 잘 못했다 언성이 높아지기 일쑤였고, 명절날 행복하게 얘기하고 놀던 그 추억은 저만치 과거로 떠나가 버리고 맙니다.
추석 때면 친가 식구들과 제사 올리고 그 음식들로 점심을 먹고는 헤어졌습니다. 다음날은 외갓집 할머니 댁에 가는 날이었지요. 자식 셋 중 한국 사는 딸은 우리 엄마뿐, 삼촌도 이모도 미국 이민자들이시니 명절에 함께 한 기억이 가물가물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아마도 자식 대표로 일당백이 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집안 사정이 좋던 좋지 않던 과일 상자랑 명절 먹을 것을 잔뜩 챙겨서는, 우리 세 자매를 데리고 추석 다음날 할머니 댁에 가고는 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고녀(지금의 여고) 다니셨던 얘기를 즐겨하셨고, 흥이 많아 노래를 종종 부르셨습니다. 아주 어렸을 적 언제였는지 그때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런 본능 저편에는 할머니가 발로 내 배를 들어 올려 비행기 태워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슬쩍 과일주 냄새가 났던 기억도 나고.... 술을 잘 못하셔서 한두 잔이면 얼굴이 발그레 해지시고는 하셨습니다.
즐겨 부르시던 18번 노래가 있었는데, 노랫말이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마저도 구슬픈 한국 가곡이었습니다.
잘 살리라 걱정하지 않으셨던 큰 딸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큰 바람막이가 되어 주지 못하는 사위가 많이 야속하셨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남편 겸 귀한 딸이었거든요. 친정 엄마인 할머니는 그런 딸이 많이 안쓰러우셨을 것입니다.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가도 아빠가 돌아오는 즈음이면 “나 이제 그만 간다” 하고 일어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는 할머니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셨으니 불효자 중에 불효자이시지요. 아마도 가세가 기울고 스트레스가 극심하셨던 것 같습니다. 몸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에 내원하셨을 때는 이미 암 4기여서,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발병을 알고 6개월 만에 엄마는 거짓말처럼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엄마가 떠나신 8년 후, 우리 할머니도 소천하셨습니다.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나는 이제 세상을 훨훨 날아다닐 것이다” 하셨던 분이셨어요. 항상 손녀들이 잘 지내는지 걱정하셨고,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니 많이 적적해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나마 이 큰 손녀는 이민 길에 오르다 보니 그 마지막 몇 해 마저 함께 말씀 나누고 추억 쌓을 시간을 놓치고 말았네요.
“너는 같은 뱀띠라도 나 같은 겨울 뱀이 아니고 한여름 삼복더위 뱀이 아니냐. 훨씬 자유롭고 네 인생에 기운이 넘칠 것이니라.” 그런 말씀을 제게 종종 하셨었는데, 힘들 때면 그 농담같이 하시던 할머니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할머니 살아생전 일본 식민 시대의 유년 시절부터 한국 전쟁, 나라를 재건을 위해 온 국민이 힘쓰던 한국 근대사 등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를 사셨습니다. 가슴을 멍들게 하던 결혼, 홀로 되신 후에는 악착같이 자식들을 키운 세월. 그 모든 것을 견뎠지만,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까지 겪으시면서 할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개인사 굽이굽이 슬픔이 많으셨던 할머니셨습니다.
할머니랑 나눠 먹었던 몰캉하고 맛있었던 가을 홍시. 감나무가 보이는 곳에 평상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홍시를 베어 물 때면 엄마도 같이 계신 것 같은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3대가 같이 뭔가 나누는 듯했던 그 할머니 집 홍시가 무척 그리운 영국의 가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