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나 쉬운 것 없는 영국 내 집 마련기
인생만사 새옹지마
영국 땅에 내 집이 생겼다.
며칠 전, 이사했다. 자가였던 서울 아파트를 판 후 십여 년 만에 내 집 마련이다. 그동안 해외로 이사를 다녔다.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생활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옛 아파트에서 기저귀 갈고 걸음마 떼던 아이들은 국제 학교를 거쳐 이제는 어엿한 중고등학생으로 성장했다.
연로하셔서 보살핌이 필요한 시 부모님, 공부에 집중해야 할 아이들을 생각해서 중년이 된 우리 부부는 정착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그렇게 짝꿍의 고향인 영국으로 이사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코비드가 시작되었고 주택 구매 가격은 계속 올랐다. 또다시 몇 년을 자의 반 타의 반, 임대 세입자로 살았다.
작년부터 대출 이율이 높아지자 현지 주택 시장이 조금씩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다. 매도자 보다 매수자 우위 시장이다. 급매의 경우, 코비드 이전 가격대로 내려온 물건도 있다. 이제는 안정된 내 집이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그동안 나는 수익형 부동산이란 이름으로 주택을 사고팔아본 경험이 있다. 제법 몇 번의 거래 경험이 있으니 영국 부동산 거래에서도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현지 시장을 잘 모르면서 말이다.
한국과 비교하면 한 없이 느린 주택 매매 과정
영국에서 집 구매는 예상보다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우선 아파트, 콘도미니엄 같은 부동산 시장과는 달리 영국은 개인 주택이 대세다. 집 형태, 연식, 구조 등이 제각각이라 주택의 가치를 가늠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
5-6개월간 주말마다 집을 보러 다니던 어느 날, 드디어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다. 우리가 집 구매 조건을 밝혔고 집주인은 동의했다. 영국 집 매매는 한국처럼 부동산 중개인이 나서는 것이 아니라 솔리시터(Solicitor), 법무 대리인이 모든 과정을 진행한다. 서류 작업에만 보통 8-12주가 걸린다. 주택 구매 계약금 걸고 두 달 안에 이사까지 마치던 서울 사람인 나는, 서류 작업에 왜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지 알다 가도 모르겠다. 양쪽 법무 대리인을 통해 서류 작업이 완료되면 그제야 매수-매도 계약서에 날인하게 된다.
계약서 날인하기 일주일 전, 매도자가 다음 이사 갈 집에 문제가 생겼다면서 무기한 보류 통보를 해온다. 주거안정을 위한 보호장치에 계약금 제도가 없으니, 어느 누가 변심해서 계약에서 발을 뺀다 한들 아무 손해가 없다. 이사 준비하던 나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다. 무슨 계약이 이리 믿을 수 없이 진행되냐며 거품 물고 화를 내 본들 로마법, 아니 현지 부동산 법이 그렇다면 따라야 한다.
주택 거래와 수익 사업이 만났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
다시 두세 달 동안 집을 보러 다녔다. 아이들 통학 거리도 괜찮고 무엇보다 큰 커뮤니티 단지 옆이라 넓은 들판 뷰가 덤으로 주어지는 집이었다. 우리가 구매 의사를 전달하며 보니 집 매도자가 개인이 아니라 법인이라 한다. 부동산을 사고팔아 이윤을 남기는 그런 회사 말이다. 한국 등기부등본 같은 것이 영국에도 있는가 찾아봤지만, 그런 자료는 개인이 열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없는 물건이라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믿고 계속 진행하기로 한다.
영국은 백 년 넘은 집들이 수두룩 하다. 계약서 날인 전, 서베이어(Surveyer) 건물감정사 서비스를 신청해 놓았다. 추가 비용이 들지만 내가 사는 물건의 상태를 어느 정도는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지은 지 갓 백 년 된 집이었지만, 내부를 새로 리노베이션 해 놓았고 외관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어 보여 감정 결과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직 짐 쌀 궁리에 집중하던 참이었다.
서늘했던 본능적 감이 들어맞았다. 건물 감정 결과, 한쪽 외벽에 균열이 있고 그 이외에도 구조적 문제들이 몇 가지 지적되었다. 딱 3개월 전 매도자인 부동산 법인 회사가 이 집을 경매로 헐값에 사다가 내부 인테리어만 보기 좋게 바꿔 던지는 물건이었다. 난 호구가 된 줄도 모르고 그 집에 이사 갈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어느 하나 만만치 않은 영국살이
처음에는 화가 났다. 그런데 나중에는 슬퍼진다. 사람이 사는 공간을 가지고 이렇게 장난을 치다니. 코비드 기간 저금리에 집을 사서 세 놓는 임대 사업(Buy-to-Let)이 활황이었고, 개인이며 법인이며 안 뛰어들면 바보 같은 시장이었다. 누군가 수익을 거둔 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동산 거래에서 손해 보는 일은 없다 자신하던 나는, 그렇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아프다.
이미 현 셋집을 비워야 하는 날을 받아 놓은 상황이었다. 나는 다시 렌트를 원했지만, 남편은 이번에 어떻게든 내 집을 산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사해야 하는 날은 다가오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인생살이 새옹지마, 세상 공부 하다.
사람도, 물건도 인연이 있다고 믿는다.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짝꿍의 설득에 결국 나는 다시 살 집을 찾아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한 집이 눈에 띈다. 나는 성사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시장 가격보다 제법 낮춰 구매제안(offer)을 넣었는데, 집주인이 선뜻 그 거래 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20년 간 이 집에서 살면서 자식들 다 키워 독립시키고 이제는 자신에게 맞는 작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으신 연로한 어르신이었다. 집을 매매하는 과정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수반한다. 정성으로 직접 보살피며 살던 집을 주인이 내놓는 것이라 더 마음에 들기도 한다.
다시 주택감정사에게 의뢰해서 받아본 결과지도 훌륭하다. 지은 지 50년 밖에 되지 않은 집이라 그런가 보다. 한국에서 아파트 30년 되면 구축으로 재개발 이야기 나오는 시장에 익숙한 나에게, 이제 50년 된 집은 연식 얼마 되지 않은 집 같은 느낌마저 든다.
살고 있는 셋 집을 비워야 하는 날과 새 집에 이사 들어갈 수 있는 날을 아슬아슬하게 맞췄다. 그동안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포장 이사가 흔하지 않은 영국 땅에서 손수 하나하나 짐을 싸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가족이 사는 집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느끼는 불안감, 낯선 다른 나라 체계에서 챙겨야 할 것을 놓칠까 겪은 마음의 좌충우돌. 아직 세상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나를 마주했다. 다시금 겸손해진다.
인생 중반부, 자신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다.
중년이 된 우리 부부는 이번 기회에 현재 재정 상태를 면밀히 체크해 본다. 아이들 교육 지원 자금, 부부 노후 준비와 같은 구체적인 계획도 수정, 보완해 본다. '해보고 아니면 바꾸면 되지'하던 옛 시절과는 달리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여러 타협점을 찾는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결과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이삿짐을 정리하다 아끼던 물건과도 이별해야 할 때가 있음을 느낀다. 특히 아이들이 커가면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보관해 오던 물건들이 한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그동안 해외 이사 다니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끌고 다닌 물건들이다. 이번에는 굳게 마음먹는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정리하는 귀한 물건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버리는 모습을 봤다. 물건을 버린다고 추억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대신 기록으로 남겨 간직한다고 생각하니 버리는 일이 훨씬 쉬워졌다.
새 집과 정 들이기
지금은 이사하고 좀 정리된 거실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고 있다. 아직 어디 여행 와서 공용숙박(에어비X비) 빌린 집에 있는 느낌이기는 하다. 당분간 이사는 생각도 하기 싫을 만큼 고생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만족감이 있다. 영국에서 집 사기는 그렇게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 과정의 일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