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태어날 아이 이름을 흐뭇하게 생각해보고 있었다. 영국 사람인 아빠 따라 영어 이름을 할지, 한국 사람인 엄마 따라 한글 이름을 할지 경우의 수가 많아진 만큼 고민해 볼 이름도 제법 많았다. 영화 스타워즈의 공주처럼 레아(Leah)가 최종 물망에 올라있었다. 그런데 그즈음 우리 집에 방문하셨던 시삼촌이 유태인 이름이라며 바람을 빼놓으신다.
우연히 신문기사를 읽다가 '단비' 이름을 발견한다. 가뭄에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 Sweet rain. 듣자마자 예비 아빠는 그 이름을 마음에 쏙 들어한다. 그렇게 아이는 영어도 아니고 한자도 없는 순 한글 이름, '단비'라 불리게 되었다.
한국을 떠나 학교 생활을 시작한 딸은 처음에는 “담비~”, “댐비~”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서양권에서는 만화 주인공인 사슴 밤비(Bambi)가 친숙해서인 듯싶다. 딸에게 흔하지 않은 이름 때문에 학교에서 불편하지 않은가 물으면 '난 별 상관없어'라고 무심히 말한다.
1967년생 줌파 라히리는 영국 런던 출생으로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했다. 바너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보스턴 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같은 대학에서 르네상스 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뉴욕에서 거주하는 작가로, 1999년 첫 소설집 <축복받은 집>으로 오헨리 문학상, 펜/헤밍웨이 문학상, 다음 해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2003년 출간한 <이름뒤에 숨은 사랑>은 뉴요커가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선정됐고, 전미 베스트셀러상을 수상했다.
이름 뒤에 숨은 사랑@마음산책
이 책은 인도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통문화와 미국식 개인주의 문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민자의 이야기다. 작가의 자전전적 이야기인 듯싶다. 주인공의 이름은 ‘고골리’. 낯선 이름이 주는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하는 한 이민 2세대 청년의 삶을 통해 “이름이 개인을 어떻게 결정하는가”를 묻고 있다.
“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임신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림은 끝도 없고, 언제나 버겁고, 끊임없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임신했을 때처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호기심과 동정심, 이해심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다.”(p.38/190 교보이북)
고글리의 모친인 아시마는 미국에서 유학 중인 남자를 따라 결혼과 함께 낯선 땅에 이주해서 산다. 말도, 문화도, 사람도 낯선 곳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경험한다. 이민 1세대인 그녀는 그렇게 첫 아이를 출산하기에 이른다.
인도인들은 애칭과 본명을 모두 갖는 경우가 흔하고, 자손의 이름을 집안 어른이 하사하는 전통이 있다 한다. 인도에서부터 친할머니가 주실 이름이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 출생신고할 날까지 도착하지 못하자, 아이의 아버지는 애칭으로 생각하던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러시아 작가의 이름 '고골리'를 아이출생증명서에 등록하게 된다.
이민 2세대의 자아정체성
“고글리는 모국어를 이해하고 제법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전혀 읽거나 쓸 수 없었다. 어느 정도의 수준도 안 되었다. 인도에 가면 친척들은 그의 미국식 영어에 무한히 감탄하였고, 소냐와 그가 영어로 얘기를 나누면 이모와 삼촌들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어”라고 하였다. 애칭과 본명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이 둘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혼동을 상징하고 있었다.” (p.78/190)
주인공 '고골리'가 겪는 두 문화 간의 림보 상황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다. 인도의 혈연주의를 바탕으로 한그공동체 내에서 '나'를 찾기 어렵고, 문 밖으로 나가면 개인의 흥미와 재능을 뽐내는 개인주의 세상이 낯설고 어렵기만 하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이 되면 부모에게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강해지기 마련이다. 이민 2세들의 성장통은 그 이상으로 강하게 오기도 한다.
부모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시는 짝으로 결혼식 때 처음 만나고, 남자는 바깥일에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 여자는 평생 매번 따뜻한 음식을 만들고 가장을 돕는 조력자로서의 삶을 산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사돈의 팔촌까지 모두 회자되고 미국에 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주위에는 벵갈사람들로 붐빈다.
인도계 모자 @pixabay
우선 주인공은 자신의이름을 바꿔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개명 신청서에 왜 이름을 바꾸고 싶은가 하는 질문에 ' 아버지가 왜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내 이름으로 지어지게 되었는지' 길게 설명해야 하는가 고민하다가 툭 진심이 나온다.
' 이 이름이 평생 싫었어요'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은 부르기도 까다롭고 의미도 모호한 '고골리' 대신 '니킬'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도 자신이 바라는 자신과 더 잘 맞는다고 느낀다.
이후 전형적인 미국 문화의 여자 친구를 통해 개인주의적 성향의 자유로운 삶을 경험하고 동경한다. 그들의 삶의 자세에 매료된 고글리는 아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부모님에게는 안부도 방문도 뜸해진다. 평생 해오던 인도식 문화는 귀찮고 번잡하다고 느낀다. '자아 부정의 단계'에 까지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평생 이타적인 삶을 살아온 어머니와 그를 사랑한 아버지에게 심정적으로 다시 돌아온 고글리가 그려진다.
아버지가 어려서 기차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 이후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을 겪는 이야기. 사고당시 읽고 있던 작가 고글리의 책이 생명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태어난 아들에게서 제2의 인생을 바라본 아버지가 '고글리'라는 이름을 떠올린 이유를 듣는다.
지금의 내가 자신으로써만이 아닌 사회 속에서 그리고 가족 문화 속에서의 갖는 의미를 되돌아본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고골리는 미국인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그동안 부정해 온 전통 인도인의 삶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자신과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인도 이민 2세인 모슈미와 결혼한다. 부모와 동포 사회가 꿈에 그리던 결혼식을 올려 온 가족과 공동체를 기쁘게 한 예식이었다.
하지만 아내인 모슈미는 곧 전통적인 결혼생활이 맞지 않음을 느낀다. 둘은 같은 인도계 이민 2세대이지만, 서로의 다른 방향성에 공감하고 헤어지게 된다.
나에게 주어진 이름이란 무엇인가.
작년부터 공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필명, 블로그명을 지어보라고 한다. 내 이름을 내가 짓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세상 좋은 의미는 다 아우르고 싶다.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동양사상서까지 샅샅이 뒤져보지만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몽골 게르체험 때 본 끝없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던 밤하늘이 생각났다. '세상에 반짝이는 하나의 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내 필명은 '세반하별'이 된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마냥 신난 세반하별
그날을 계기로 돌아보니 부모님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이름은 '밝은 구슬', 세례명은 '밝은 빛'이었다. 아마도 세상이 나에게 주고 싶었던 의미는 '스스로 반짝이는 삶'이었나 보구나 싶다.
이름은 누군가에게 불리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세대가 이어지는 부모)이 아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만트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평생 반복되어 불리면서 그 소망들이 희미한 방향성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성당에 다녀오는 길, 세례명마저도 동일한 딸에게 물었다. “너는 단비라는이름이 어때?”, “ 뭐 그냥 내 이름이지 뭐.”
마른 대지에 단비까지는 아니더라고 평화롭고 충만하게 마음껏 네 삶을 살아가기를. 엄마인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딸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