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크리스마스에 가족이 모두 모이기를 고대하셨던 시 아버지. 사랑하는 가족들도, 매년 드시던 전통 크리스마스 정식도 모두 몸의 무리를 주었나 보다. 새벽녘 헛구역질하시는 소리를 듣고는 나머지 가족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얼마 전 심장 수술을 하셨던 시 아버지는 그 심장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복용하는 약을 위(胃)에서 거부하는 부작용을 겪고 계신다. 평생 활동적이셨던 아버지는 이젠 도보용 지팡이가 필요하고 2층 계단을 오르내리기 벅차 집안 리프트를 설치한 참이다. 급격히 노쇠해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가족들은 말은 않지만 눈빛으로 걱정과 함께 혹시나 다가올지 모르는 이별의 마음도 조심스럽게 준비해 가고 있다.
크리스마스 지나고 3주 후, 일곱 명의 손자 손녀 중 첫째의 21살 생일 파티가 열렸다. 영국에서는 21살을 완전한 성인이 되는 나이로 보고 크게 파티를 한다. 잉글랜드 북서부에 위치한 시댁. 교통상태가 좋을 때 네 다섯시간 고속도로를 달려야 할만큼 멀리 떨여져 사는 우리는 평소 같았으면 이런 무리를 하지 않았겠지만, 무엇이든 시 아버지와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몇 시간 고생은 문제가 아니다.
3주 만에 다시 뵌 시 아버지는 지난 크리스마스 때보다 완연히 회복된 모습이시다. 얼굴에 분홍빛 혈기가 보이고, 방문한 아들 네와 이야기하시고자 하는 열정이 보인다. 몇 달 후 부활절 연휴기간 그리스 여행 패키지도 둘러보고 계신다. 그 옆에서 시 어머니는 “난 안 가” 하시면서 별 일 아닌 듯 농담처럼 말씀하신다. 왜예전처럼 여행 다니고 싶지 않으시겠나만, 남편에게 해외여행은 무리일 거라는 전직 간호사인 시 어머니의 근거 있는 핀잔이다.
그날 저녁 7시. 여섯 명이 미니 버스 사이즈 택시에 옹기종기 모여 탑승하는데 아버지는 기사 옆자리에 타겠다고 하신다. 집안 어른으로 택시 값을 자신이 지불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택시는 가족들을 태우고 30분 여 깜깜한 밤길을 달린다. 어머님이 문득 “오래간만에 주말 밤을 즐기러 나가니 무척 흥분되는구나” 하신다. 어디몸이 아픈 환자뿐이겠는가. 남편의 고통을 옆에서 함께 하는 시 어머니 또한 바람을 쐬실 필요가 있다.
가족 지인들과 친구들이 50여 명 정도 모여 삼삼오오 인사도 나누고 술 한잔씩 하면서 담소를 나눈다. 오늘 생일 파티의 주인공. 뷰티퀸처럼 휘장을 두르고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등장해서는제일 먼저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와주셔서 감사해요” 인사를 한다. 오늘의 추억을 담아두려는 듯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는다. 시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사진 찍으시느라 모델처럼 바쁘시다. 컨디션이 좋으신지 맥주도 평소보다 많은 두 잔을 드시고 식사로 나온 감자 파이까지 말끔히 잡수신다. 파티 참석이 가능하시려나 걱정했는데 무려 두 시간이 넘게 즐기신다.
거의 일 년 동안 수술에 입 퇴원을 반복하시던 아버지, 사실 불과 몇 달 전 만해도 이렇게 떠나시나 걱정하던 시간이 있었다. 오늘 밤 뵈니 역시 아버지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도 아직 여흥이 가라앉지 않았다. 시부모님과 우리는 와인 한잔씩 채워 모여 앉는다. 그러면서 시 아버지는 옛날 사진 한 장과 문서 기록을 보여주신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 보다.
시 아버지의 아버지 H는 2차 대전 참전 용사셨다. 젊은 나이에 영국 보병으로 본토 방위뿐만 아니라 북 아프리카 파병을 나가셨단다. 그 와중에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이탈리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셨고 독일군을 따라 오스트리아까지 끌려갔었다고 한다. 그동안 여러 가지 고초를 겪으셨지만 어쨌거나 살아 고국으로 돌아온 운이 좋은 전사셨다. 문제는 그 이후에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사회 적응을 잘하지 못하셨고 외 아들이었던 시 아버지 세 살 때쯤 돌아가셨다 한다.
어린 시절 홀 어머니와 외 아들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란 아버지. 하지만 그 어머님의 품성이 참 따뜻했던 분이었던 것 같다. 시 아버지를 보면 안다. 아들을 사랑으로 챙기시는 분이셨고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가르치셨다고 한다. 여동생이 있었다고 하는데 생후 7개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남편과 딸을 잃고 외 아들을 혼자 키워내신 시 할머니. 굴곡진 삶을 살아가셨을 그분에게 존경심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2차 세계 대전 하면 영국은 승전국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들에게도 전쟁의 상흔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다른 점은 일제강점기 실종되신 내 친할아버지는 어찌 돌아가셨는지 자료를 찾을 길이 없었던 것에 반해 나의 영국 증조 시아버지는 국가 공식 자료상 엄연히 남아 계신다는 차이다.
유년기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울 시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셨고 그 덕분에 공부의 시간이 짧았다. 덕분에 아들 넷을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육체노동을 하셨다. 예를 들자면 시멘트 로리 운전사, 교도소 교도관 같은 일 말이다. 퇴직하신 이후에는 우편배달부 일을 하셨고 작년 수술 전까지 도서관 사서의 일을 돕는 봉사 활동을 하셨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아들들은 심심할 틈이 없었던 듯하다. 주말이면 축구하느라 바빴고, 레스토랑은 너무 비싸니 집에서 만든 샌드위치 싸들고는 산과 들을 뛰어다녔단다. 시 아버지는 근면하셨고 아들 넷 어느 하나 빠짐없이 제자리에서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반듯하게 살아가도록 키우셨다.
시 아버지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부모님과 함께 경험하거나 그분들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언제 입대해서 어디에 배치되었고 어디에서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했으며 어디에서 구출되어 귀국을 하게 되었는지, 상태는 어떠했고 그동안 무슨 일들을 해왔는지 이야기하실 때면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함께 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말이다.
보통 유년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는 경우 나중에 아버지가 되어 역할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혼돈을 느끼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항상아들들이 아버지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애쓰는 것을 보면 시 아버지는 그 역할을 멋지게 해내셨다.
아들들에게 ‘좋은 아버지, 함께 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으셨다는 시아버지의 말씀이 기억난다.
본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부창부수,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애쓰는 시 아버지를 시 어머님이 많이 챙기신 것 같다. 어머님 유년 시절도 그 안의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참전 가정은 아니었기에 좋거나 슬프거나 함께 이겨낸 가족 사랑을 자연스럽게 배워 체득하신 분이었다.
하루는 시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처럼 하시는 얘기를 들었다.
“아들 넷이 다들 행복하게 잘 살아가니 난 참 운이 좋아. 아내와 이렇게 한 5년 정도 더 살 수 있다면 이제는 바랄 게 없겠어.”
한 소년의 세상은 온통 가족 사랑이다.
외 아들이었던 자신이 19명 직계 가족의 어른이 되신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신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겠나 만 ‘서로에게 친절하라’고 말씀하시며 모두를 아우르는 시 아버지의 품 안에 온 가족이 함께 하고 싶고 행복한 요즘이다.
시 아버지, 부디 바라시는 대로 오랫동안 사랑하는 가족들과 세상 마음껏 즐기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