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우선순위
잔 기침을 몇 달째 달고 산다. 이쯤이야 집에서 정성들여 만든 집밥 먹으며 좀 쉬면 나을줄 알았다. 거의 3주간 끊임없이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던 영국 날씨도 기침감기에 불을 붙였다. 손발이 원래도 찬데, 겨울이라 더 아리게 시리다.
약을 먹으면 유난히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화학약품 말고도 세상의 좋은 기운으로 힐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음식들이 많다. 나는 자연의 힘을 믿는다. 하지만 남편은 나의 자연치유 사랑 때문에 병을 키운다고 푸념한다.
영국에서 의사를 만나려면 전화로 상담을 먼저 받는다. 급한 경우에 한해서 당일에 의사를 만날 수 있지만, 대부분 간호사나 주니어 닥터와 전화통화로 복용할 약을 추천받거나 일주일쯤 기다려야 의사를 만날 수 있다. 예약하는 번거러움을 핑계삼아 차일피일 병원방문을 미루면서 약국에서 목감기 좋다는 시럽을 사다 먹어도 봤지만, 달기만 하고 효과는 없었다. 어렵게 만난 담당의사는 항생제 일주일치와 가슴 X레이 촬영을 해보자고 한다. 폐기능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내가 안다. 요가 수련하면서 그리 호흡을 연습하지만 문제가 없다. X레이 결과로 이미 알던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처방받은 항생제를 복용해보지만 내 기침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
때마침 영국 최대 명절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평소에도 의사 만나려면 기다려야 하는데 주니어 의사들이 연말 월급 인상 시위를 한다고 한다. 병원 대기줄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느니 그냥 명절에 집중하기로 한다. 아플 때 가끔은 그저 슬쩍 앓게 놔두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 면역력은 예상보다 강할 때가 많다.
바램과는 다르게 명절동안 열심히 먹고 마시는 중에도 기침을 한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중에 기침이 나오는데, 일상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따뜻한 물도 많이 마시고 목에 좋다는 자연식품들도 챙겨 먹어보지만 아무래도 원인을 잘 못 짚고 있나보다.
첫 처방 후 한 달여가 지나 다시 만난 담당의사는 기침하는 기간이 3개월이 넘어가다보니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에는 콧물이 기도로 넘어가서 기침이 생기지는 않는지, 몸에 산성 기운이 많지는 않은지 처방약을 바꿔 보자고 한다. 이렇게 한 달 복용해보고도 차도가 없으면 나를 대형병원 호흡기 클리닉으로 보내겠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코로나 이후 호흡기 내과는 이미 많은 환자들로 넘쳐난다는 뉴스를 봤다. 더욱이 대형병원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무척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는 뜻이다. 특유의 병원 소독 냄새와 함께 아픈 사람들이 세상에 이렇게 많았는지 놀라울 정도의 번잡함을 경험하게 된다. 병원에 있는 동안 병을 만드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리 엄마를 암으로 잃었다. 발견 당시 이미 암 3기말로 의학적으로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미리 몸의 상태를 보살피고 관찰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때늦은 반성이었다. 의사선생님께서 마지막 시도로 임파선 제거 수술로 암세포의 확산을 막아보자 제안하셨다. 엄마를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온 가족이 수술진행에 동의했다. 기대와는 달리 임파선이 제거됐음에도 불구하고 암세포는 온 몸으로 계속 퍼져 나갔고 개복수술은 엄마를 와병생활의 급행열차로 인도하고 말았다. 그 때 본인이 원하시던대로 수술 대신 차분히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시간과 평화를 드렸다면 어땠을까. 더 평화롭게 임종을 맞이하지 않으셨을까. 수술 이후에도 기 치료다 민간 요법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는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다. 결국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을 의술로 어떻게든 잡아보려 했던 것을 그 때 뼈저리게 후회했다. 끝까지 가족으로서 함께 있어 달라 매달리기만 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나는 지금도 내 몸의 자연치유능력을 믿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화학약을 복용해서 한 방에 나의 몸 체계를 무너뜨리는 경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에 할 수 있는 일보다는 내 능력 밖의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것도 엄마를 잃으며 깨달았다. 자연에 순응하고 그 순간을 충만하게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제철 음식을 챙겨먹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정하고 균형잡힌 식사를 하려고 노력한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 식사 시간 등 일상의 루틴을 단조롭고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애쓴다. 평소에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이번 기침 감기는 스스로 회복할 시간을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이 되지 않았다. 다른 부작용이 생기기 전에 과감히 의학의 힘을 빌려 회복하는 용기도 필요하겠구나 싶다. 자연스럽게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가족들과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우선순위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