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버지 병환 그리고 희망
헤어질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하니 더 아련하고 꼭 붙잡고 싶습니다.
“아버지 상태가 위중한 것 같아”
어제부터 어머니 옆에서 밀착 수행 중인 큰 형과 통화한 남편이 눈물 그렁그렁 한 눈으로 놀라 소식을 전합니다. 아버님 심장이 올해 계속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더니 그제부터 위험한 상황에 있습니다. 남서쪽에 사는 우리 집에서 북서쪽 시댁까지 이동시간이 있기에 언제든 위험하시다 싶으면 바로 출발할 마음으로 남편은 미리미리 이번 주 일 체크하느라 바쁩니다.
마침 이번 주 중간 방학으로 집에 있던 아이들도 아빠에게 소식을 듣고는, 차분히 일상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이제나저제나 아버님 건강 상황 업데이트받다가 다행히 오늘은 무사히 넘기실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우리 네 가족은 오후 느지막이 집에서 멀지 않은 해변 산책을 나갑니다.
집에서 자동차로 30여 분을 달리면 영국 남서부 엑스머스 해변에 닿습니다. 이곳은 모래가 곱고 해변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곳입니다. 오늘도 가족 단위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동행한 우리 집 강아지 코코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찾아 물더니 신이 나서 여기저기 뛰어다닙니다. 서로 한참 도란도란 얘기하며 걷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가 싶더니만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아차! 날씨 변화가 많은 영국 땅에서 오늘 기상도 체크를 하지 않았음을 알아차립니다. 뭐 우산도 없고 다들 그 자리에서 비 쫄딱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지요. 우리 집 강아지는 더 신이 나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우리는 뭐 이미 젖은 걸 어떡하겠냐 하면서 얼굴 보며 깔깔 웃습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혹시라도 할아버지에게서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려올까 봐 다들 긴장하고 있었던 게지요.
아빠인 남편은 어렸을 때 해변가에 가면 시아버지와 아들 넷이 축구공 차고 놀았던 추억 얘기를 합니다. 보아하니 기운 넘치는 아들들을 키우신 시아버지는 매번 몸으로 뛰어다니며 놀아주셨던 것 같습니다. 어디만 가면 축구 한 얘기, 등산한 추억이니 말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큰 딸은 영국 이사 와서 가장 처음 바닷가에 뛰어든 곳이 여기였다면서 추억을 얘기합니다. 예전 살던 동남아 따뜻한 바닷물 생각하고 뛰어들었다가 대서양 차디찬 바닷물에 다들 혼비백산 놀랐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코비드 락다운이 풀리자마자 집에 있는 것이 숨이 막히듯 답답해서 제일 먼저 외출했던 곳도 이 해변이었네요. 이 광활한 해변가가 그렇게 우리를 품어주었던 기억들을 하나둘씩 나누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빗줄기가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얘들아 핫초코 마실래?” 아빠의 말에 두 딸의 얼굴이 반색을 합니다. 오늘은 마시멜로우에 초코바까지 꽂아 아주 럭셔리한 핫초코가 되었습니다. 바닷바람에 추웠었는지 아이들이 무척 행복해하며 먹습니다. 조금 걷다 보니 영국의 명물, '피시 앤 칩스' 가게가 보입니다. “우리 하나씩 먹자” 하고는 취향 따라 전통 생선 튀김, 점보 소시지, 관자 튀김. 각자 취향에 맞게 하나씩 고르니 그 옆에 갓 튀겨 나온 감자칩이 함께 담겨 나옵니다. 영국식으로 식초를 튀김 위에 잔뜩 뿌리고 케첩, 타르타르소스를 한 움큼 집어 들고 벤치에 앉습니다. 보통은 감자칩 채가려고 주위를 빙빙 도는 갈매기들 때문에 벤치는 조심해야 하는데 오늘은 비가 오니 갈매기들이 없어 좋네요. 시간이 오후 3시인데 아직 점심 전이었음도 그제야 알았습니다. 바람 부는 해변에서 호호 불며 먹는 감자튀김이 오늘따라 꿀맛입니다. 배가 고파봐야 음식이 더 소중하고, 인연도 헤어질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하니 더 아련하고 꼭 붙잡고 싶습니다.
문득 시아버지도 바닷가 좋아하시는데 생각이 닿습니다. 아주 전형적인 영국 할아버지이시거든요. 바닷가에 오면 계절 상관없이 물에 뛰어드셔야 하시는 분이시고, 수영 끝나고 나오시면 '피시 앤 칩스'를 그렇게 맛있게 드실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맥주도 한잔 꼭 하시고요. 그 옆에서 항상 애정 담긴 잔소리 하시며 냅킨 챙기시는 시어머니. 오늘 시어머니에게는 아주 힘든 날이셨을 텐데, 위로한다고 전화 걸기도 조심스럽습니다. 딸이면 그러고도 남았을 텐데, 며느리는 더 조심스럽습니다.
두 달 전에 시부모님은 여름휴가처럼 남쪽 사는 우리 집에서 4박 5일 쉬다 가셨었습니다. 저녁 즈음 집 주변 펍에 같이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얘야 우리 너네 집 어디인지 아니 너 먼저 가려무나”. 노부부가 먼저 가라고 채근하십니다. 아버지 걸음이 늦으시니 먼저 네 속도대로 가라는 말씀이셨지요. 그리고 보니 그날도 비가 부슬부슬 왔었네요. 천천히 조심조심 걸으시는 아버지 옆을 든든히 지키며 걸으시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빗속 가로등 불빛에 비치며 눈 시리게 참 예뻤습니다. 잘 오고 계시나 뒤돌아보면 “얘야, 어서 먼저 가래도” 크게 말씀하시던 시아버지. 인생은 추억을 쌓아가는 여행인 것 같습니다. 아직 모든 가족들은 아버님과의 여행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우리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언제나처럼 함께 즐겨야지요.
어서 쾌차하세요 아버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