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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서 산 막걸리 한잔에 소환된 할머니 이야기

by 세반하별

어무이, 저희 와써예~”

“ 할머니~~~~~”

우리 가족이 명절맞이 대문 열고 우당탕 들어서면 “왔나~”하시면서 꽉 끌어안아 주시던 외할머니. 명절 당일에 친가 제사를 올리고 나면, 다음날은 혼자 사시는 외 할머니댁에 가서 제2라운드 파티를 시작한다. 친할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꼿꼿이 앉으신 상태로 주름하나 없는 흰 봉투에 세뱃돈을 넣어 주시는 스타일이셨다면, 외할머니는 전 부치다가도 지금이 제일 맛있는 때라며 손으로 그 뜨거운 생선 전을 호호 불어 입에 넣어주시던 정겨운 분이셨다. 그러다 보니 친가에서는 각 잡고 철든 아이인 척했고, 외가에만 가면 한껏 어리광을 부리는 철부지가 되었다.


하루종일 복작복작하던 부엌일이 슬슬 마무리되고 큰 상을 펼치면 떡이며 갓 부친 전, 좋아하는 나물 반찬들이 한 상 가득. 인사하러 오시는 분들의 방문이 이제 좀 띄엄띄엄해지고 조용해지면 할머니와 엄마는 두 사람만의 술상을 다시 보신다. 이런 날은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밤맛 막걸리도 한 병 딴다. 특별한 날이니 만큼 나도 늦게 까지 할머니와 엄마 옆에 앉아 먹고 놀았다.


하루는 할머니가 '할머니의 할머니' 얘기를 해주셨다. 나에게는 고조 할머니 되시겠다.

내 할머니가 소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주 어릴 때, 명절 하면 온 동네가 집 마당에서 함께 하는 잔칫날이었다고 하신다. 그때의 고소했던 그 기름 냄새, 품앗이로 음식 하던 동네 아낙네들, 신이 나서 뛰어놀던 동네 아이들, 탁주잔 부딪히는 소리... 할머니의 상세한 묘사와 함께 지금 내 눈앞에 그 광경이 펼쳐지듯 생생하다. 나는 그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 들었다.


내 고조할머니는 전주 이 씨손이셨다고 한다. 할머니 표현을 빌리자면 기개(氣槪)가 대단한 여장부셨다고 한다. 부산에서 크게 탁주 사업을 하셨다는데, 쌀이 귀한 때라 탁주를 만든다는 것은 그 지방의 유지나 할 수 있던 일이었다고 한다. 존경받는 양반에 부유했으니 동네에서 신망이 높았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은 고조할머니가 진두지휘를 하고 고조할아버지는 묵묵히 할머니 옆에서 손과 발이 되어 보좌한다고 생각했었다 한다. 하지만 손녀가 기억하는 고조할머니는 궁중음식처럼 정성 들여 만든 반찬과 아랫목 이불 밑에서 막 꺼낸 따끈한 밥공기를 한 상에 보기 좋게 담아 하룻 동안 애쓴 남편에게 두 손으로 올리던 충정의 아내로서의 할머니를 기억하신다고 한다. 두 분 금슬이 좋으셔서 집안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도 한다. 나는 지금 내 앞의 외할머니를 두고 어린 소녀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가 쪽진 머리로 호령하시는 고조할머니 모습이 되기도 하는 상상을 한다. 늦은 저녁 정 다운 이야기를 나누셨을 고조부모님들의 행복한 모습도 그려본다.


그 당시 옆 나라 일본 제국주의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안팎으로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있었고, 쌀이 귀해 끼니를 굶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고조할머니는 탁주를 빚고 남은 쌀지깨미를 동네 사람들이 와서 가져다 먹을 수 있도록 하셨고, 추석이나 설과 같은 명절이면 집 마당에서 동네잔치를 베푸셨다고 한다. 어린 소녀였던 내 할머니는 그런 자신의 할머니가 너무 멋져 보여서 크면 나도 할머니처럼 살겠다 다짐했었다고 하신다. 음식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하고 생산해 낸 탁주들이 상마다 놓이면 그날만큼은 동네 사람들이 근심을 내려놓고 맛있게 음식을 나눠 먹으며 명절을 보냈다고 한다. 담장을 넘던 그 웃음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고 말씀하시더니, 밥상 위 밤 막걸리를 찾아 시원하게 한잔 드신다.


그러던 어느 날 장군 같으셨던 고조할머니는 심한 배앓이를 하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맹장염이 아니었나 싶다고 하시는데, 고조할머니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니 고조 할어버지가 급히 동네 침쟁이를 불러 시술하도록 하셨단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시술 후 고조할머니의 상태가 급속히 나빠졌고, 사흘 후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고조할아버지가 그 싸늘히 식어가는 고조할머니를 붙잡고 자신의 잘못이라며 끄억끄억 목 놓아 우시던 그 깊은 절규를 기억하신다고 한다. 황망히 떠나신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모였고 자발적으로 모인 장정들이 상여를 메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고 한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그렇게 베풀고 입에 풀칠하게 해 주었던 어른을 잃은 터라 동네 사람들의 상심도 컸다고 기억하신다. 이후 일본의 쌀 수탈이 노골적으로 시작되었고 쌀로 술을 빚는 탁주 사업도 그렇게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어린 손녀가 내 할머니가 되실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눈물이 그렁그렁하신 것 같은 느낌은 내 상상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외할머니와 엄마는 그렇게 밤맛 막걸리를 한 잔씩 시원하게 들이켜셨다. 이틀 내내 명절상 차리느라 편히 앉을 새 없이 바빴던 엄마의 얼굴빛이 발그레 해지고, 할머니는 그즈음이면 민요 한 자락을 뽑으셨다. 어깨를 둥실둥실 손끝 매무새까지 신경 쓰시는데 꼭 전통춤 무용수 같다. 외삼촌도 이모도 모두 미국 이민을 가다 보니 자식들 중 장녀인 엄마 하나만 남은 명절의 헛헛함도 그렇게 노래와 춤으로 채워나가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추억에 어떤 각색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몇 년 전 종갓집 기록들을 찾아보니 할머니 추억 속의 인물들이 기록 속에도 띄엄띄엄 남아있었다. 지금은 소천하신 할머니 그리고 엄마. 그 당시 하시던 말씀들을 잘 적어뒀으면 더 입체적으로 그 역사를 기억하기 좋으련만, 지금은 기억의 퍼즐을 맞춰봐야 한다. 늦었지만 내가 지금이라도 글로 남기려 하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지금 살고 있는 영국 아시안 마트에 가면 막걸리를 살 수 있다. 밤맛은 아니지만 몇 종류가 구비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살 때보다 그 가격이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막걸리 뚜껑을 따면 '치익~ '하고 효모 발효 소리가 나야 하는데, 이곳에서 구매한 막걸리는 조용하다. 아무래도 제조 운송 과정이 길다 보니 신선함이 떨어져인 것 같은데 맛도 예전 기억만 못하다. 아주 가끔 그래도 막걸리에 손이 가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때의 명절이 그리워서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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