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걸음
유성은 학교 정수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자 아리수 한 줄기가 올라왔다. 입을 대고 마시고 있는데 등 뒤 저편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못 잡겠지? 열 받지? 얄밉지?”
장난기 넘쳐흐르는 남자애 웃음소리가 들렸다.
“잡히면 뒤졌다.”
여자애가 말하고 코끼리 떼처럼 추격하는 두 사람 소리가 들렸다.
“까아아아아악!”
가까이 쫓겼는지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신경에 거슬렸지만 관심 없이 물만 마셨다.
“푸흡.”
누가 등 뒤를 과격하게 들이받았다. 정수기가 기우뚱했다. 물이 코와 입으로 들어와 머리끝까지 아픔이 찔러왔다.
“커헉. 콜록. 콜록.”
유성은 코를 싸쥐며 돌아봤다. 빡빡이 머리에 뺀질뺀질하게 생긴 애가 뺀질뺀질하게 웃으며 유성을 쳐다봤다. 추격하던 여리여리하고 예쁘장한 단발머리 여자애는 멈추고 벌어진 상황을 쳐다봤다. 빡빡이는 가만히 유성을 쳐다보더니 웃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이고 뛰어가며 말했다.
“야, 이지희. 우리 반에서 니가 제일 못생김.”
“저 개새...!”
유성과 지희가 동시에 소리치고 서로 마주봤다. 빡빡이가 우뚝 서서 돌아봤다. 유성에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뭐라 했냐?”
“니 욕.”
지희가 푸흡 웃음을 터뜨리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뭐?”
빡빡이가 유성 어깨를 툭 밀쳤다. 빡빡이 명찰에 써있었다, 이지형. 유성도 밀쳤다. 개싸움 시작됐다.
“야! 너네 안 떨어져! 이것들이…!”
물어뜯고 할퀴며 한참 싸우는데 지나가던 선생님이 소리쳤다. 둘은 떨어진 채 씩씩거렸다.
“왜 싸웠어?”
둘을 세워놓고 선생님이 다그쳤다.
“안 싸웠는데요.” 지형이 말했다.
“안 싸웠지, 우리?”
“응.”
“이것들이 지금 장난해?”
둘은 그 자리에서 나란히 손을 들고 섰다.
“미안.” 지형이 말했다.
“내가 더 미안.”
“내가 더더 미안.”
“난 숨도 못 쉬게 미안.”
“난 관 짤 때까지 미안.”
“난 시체 염할 때까지 미안.”
“난 자손 사대 날 때까지……”
그때 유성 눈앞으로 한 애가 지나갔다. 그 애를 유성이 주시한 이유는 두 번째, 그 애가 145cm인 유성보다 작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다목적실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치던 애였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네.
유성은 모퉁이를 돌아가는 여자애를 주시했다.
교복 위에 입은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쓴 유성은 친구들과 복도를 걸었다. 키가 훨씬 큰 지형이 유성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앞에서 그 여자애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어찌나 작은지 백삼십 센티미터도 안 될 것 같았다. 여자애가 들고 있던 책을 땅에 우르르 떨어뜨렸다. 유성은 쳐다봤다.
물어볼까?
유성은 책을 주워주며 노래 제목을 묻는 장면을 상상했다. 이상했다. 먼저 친해져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친해지지?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여자애가 책을 다 줍고 다시 뛰어 내려갔다. 그까짓 노래 더럽고 치사해서 안 듣고 말기로 했다.
복도에서 식당에서 백삼십 센티미터를 볼 때마다 유성은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 앤 항상 혼자 다녔다. 복도에서 책을 들고 갈 때도, 체육대회 때도.
사생대회 때도 유성은 혼자 앉아있는 백삼십을 물감을 가지고 친구들과 시끄럽게 장난치며 봤다. 경복궁에 갈 때도 지하철에서 친구들 일고여덟과 앉아있다가 맞은편에 혼자 앉아있는 백삼십을 보는 유성을 지형이 흔들었다.
“그래서 이지희가 뭐랬다고?”
“사귀쟤.”
식당에서도 백삼십은 항상 혼자 창가 4인 테이블에 앉아 먹었다. 청승맞아 보여 같이 먹어주고 싶었다.
“야, 우리 여기 앉자.”
그 애가 앉은 테이블 바로 옆 8인 테이블에 앉으며 유성이 말했다. 나이스. 유성은 미소지으며 옆에 있는 그 애를 쳐다봤다. 복도에서도 식당에서도 체육대회에서도 사생대회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예술제 때도 유성은 계속 쳐다보는데 도저히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도 그랬다. 밥을 먹으며 부담스럽도록 쳐다보는데 몰랐다. 유성은 친해지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유성은 157센티미터가 되었고 가을이 지나며 170이 되었다. 얼굴도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아무도 여자라는 오해를 하지않았다.
“얘 뭔 콩나무냐? 니 그 얼굴에 키까지 크면 개 사기 아님?”
복도를 걸으며 지형이 말했다.
“아니지. 성질머리 딱 하나 오지는 거 있잖아.”
뒤에서 윤민지가 말했다. 지형이 칵칵 웃었다.
“지 뜻대로 안 되면 겁나 히스테리 부리는거 인정?”
“개 인정. 겁나 독단적.”
손가락 총을 만들어 신나게 웃으며 말하는 지형을 사슴 같은 눈으로 마주 보며 민지가 유성에게 말했다.
“진짜 니는 그거 빼면 앞에서 이렇게 디스해도 웃어넘기지, 개잘생겼지, 웃기지, 착하지, 그거만 빼면…”
말하던 민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멈췄다. 지형, 유성, 민지 옆에 가던 황미나까지 찬물 끼얹듯 조용했다. 유성이 얼굴이 달아오른 민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싫냐?”
“어?”
“싫냐고.”
진짜 개존잘이다, 민지를 갑작스레 뚫어져라 쳐다보는 유성 눈빛을 보며 미나가 속말하곤 긴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민지 표정을 보며 웃음을 눌렀다.
“아, 아니.”
“그럼 좋아?”
민지가 새빨개진 채 말했다.
“좋으면 어떡할 건데?”
“고백해. 사귀어줄게.”
유성이 다시 앞을 봤다.
“오오! 오오! 야, 민지야. 정유성이 너랑 사귄대.”
미나가 얼음이 된 민지를 팡팡 치며 신나게 웃었다.
“사귀어!” 미나가 소리쳤다.
“서민정은 어쩌고?” 지형이 유성이 삼 주째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를 물었다.
“헤어질 거임.”
말하며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 앞을 걸어갔다. 그때 찰나의 순간, 1초와 1초 사이 짧은 순간, 맞은편에서 오는 백삼십과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백삼십은 둔감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겨울 점심시간, 식당에 사람이 미어터지게 많았다. 유성은 친구들과 식판을 들고 배회하다가 자리가 꽉 찬 12인 테이블 끝에 혼자 앉아있는 그 애를 봤다. 맞은편 자리가 비어있었다.
접점!
유성은 웃었다.
“야, 자리 없으니까 다 흩어져서 걍 혼자 먹어.”
유성은 친구들에게 말하고 신이 나 다가갔다. 먹다가 자연스레 말을 붙이기 딱이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노래 제목도 물어보는 끝내주는 전개였다. 그때였다.
“김은오!”
키가 백팔십은 될 듯한 거대하고 늘씬한 여자애가 식판을 들고 달려와 그 자리에 앉았다. 누군지는 유성도 알고 있었다. 방송도 탄 적 있다는 체육 천재 김장미.
친구가 있었어?
그때, 그 애가 김장미를 보며 활짝 웃었다. 두 눈이 활처럼 휘어지며 웃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유성은 몰랐다.
예쁘다.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유성은 약간 김 샌다고만 생각하며 뒤돌아 갔다.
그때 장미가 홱 돌아봤다. 유성 뒷모습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정유성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