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걸음
늦은 오후, 매점 안에 남자애 둘과 여자애 셋이 모여 피자빵과 피크닉을 먹고있었다.
“야, 정유성 김은오랑 헤어졌대.”
“세기말에 파란난거 가지고 겁나 새삼스럽네.” 소희가 피크닉을 빨아당겼다.
“근데 걔 니네 반 왕따 아니냐? 애들 걔 다 싫어하던데.”
준혁이 말했다.
“은오 왜? 은오 착한데.”
소희가 말했다.
“지랄. 야, 걔 다 싫어해.”
하영이 피크닉을 내려놓았다.
“진짜로? 왜?”
“걔 1반 오경아가 정유성이랑 사귈 때 연애상담 다 해주고 난리쳐놓고 지가 가서 사귄 거 아는 애들 다 알아.”
“정유성이랑 사귈 땐 쫄리니까 아무도 못 건드린 거고. 그리고 짜증 나잖아, 지가 뭔데 정유성을 꼬시냐? 아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애여야 봐주지 뭔 저런 비교도 안 되는 찐따가…”
“아니 근데 걔 따 아니던데, 잘 지내던데?”
세진이 묻자 하영이 인상을 썼다.
“정유성이 존나 싸고돌잖아. 개싸고돌아, 진짜. 걔 정유성만 아니었으면 따야.”
“정유성이 걜 왜 싸고돌아? 찼다매?”
“아 몰라, 그니까.”
“그런 거네.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냥 좀 챙겨주고 싶은. 동정심.”
“어 맞아. 솔까 야 정유성이 걜 좋아서 그런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어휴, 오경아만 불쌍하지.”
눈이 엄청 퍼부었다. 일이 분 지각은 자주 해도 아예 수업을 빼먹은 적은 한 번도 없던 은오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
“쌤, 김은오 왜 안 와요?”
조회 때 유성이 담임에게 물었다.
“은오 일이 생겨서 좀 늦는대.”
1교시 수업 전 쉬는 시간 현수와 지형이 사물함 앞에 서있었다.
“…그래서 또 난리 나 가지고 도망 나와서 밖에서 밤 샜나봐.”
“난 그 형 별로. 너도 그 형이랑 놀지 마.”
“아니 근데 김은오가…”
“누구?”
교실로 들어오던 유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수 어깨를 잡고 물었다. 현수가 멈칫했다.
“박서환 얘기하지? 너 김은오 왜 안 오는지 알지?”
에이 씨, 현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유성이 인상을 구겼다.
“야, 니 진짜 하나만 하라고. 너 그 형 친구냐? 우리 친구냐? 하나만 해.”
유성이 팔짱을 끼고 현수를 쳐다봤다. 지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성 쪽에 가 섰다. 절교다, 형...마침내 현수가 고개를 들었다.
“걔네 아빠 알코올 중독이거든.”
“어어.”
유성이 팔짱을 풀고 다가가 집중했다. 지형도 붙었다.
“아빠한테 또 맞고 밖에서 밤 샜나봐. 아니 근데…”
유성이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은오가 걔네 집에서 걔 간호해줬대.”
“어어?” 지형이 큰 소리를 냈다.
“가지가지 한다.” 유성이 실소했다.
“정유성, 내 자리 가서 유리세정제 가져오면 쓸기 면제.”
담임이 청소당번인 유성에게 말했다. 교무실로 향하는데 복도 계단참에서 은오를 발견했다. 어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유성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은오를 지나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정유성.”
유성은 멈춰섰다.
“너 친구들 중에 박서환이랑 친한 애 있으면 걔한테 좀 가보라고 말해주면 안 돼? 아니, 걔가…”
유성은 어이가 없어 썩은 웃음을 흘렸다. 뒤돌아 별꼴을 다 보겠다는 듯 야, 부르자 은오가 움찔했다. 유성이 대꾸했다.
“걱정되면 니가 가보면 되겠네.”
교실로 돌아와 한창 청소하는데 기다리고 있던 현수가 말했다.
“야, 이 형 돌았나봐.”
유성이 대걸레질을 하다 말고 현수를 봤다. 현수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말했다.
“김은오 오면 잘 거래.”
현수 말이 들리는 거리엔 유성뿐이었다. 유성이 차갑게 굳었다. 손에 들려있던 대걸레가 바닥에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걔네 집 어디야?”
“여기 바로 앞에 아파트 103동 204호.”
유성은 그대로 뛰쳐나가 달렸다. 1학년 교실은 6층이었다. 한 걸음 만에 계단 한 층을 뛰어내리자 발목에 찌릿 하고 무리가 왔다.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깨물고 발목을 꾹 잡았다. 통증이 가라앉자마자 다시 뛰었다.
아까 본 은오는 절대 긍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유성이 은오 얼굴에서 읽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유성은 운동장을 바람 같은 속도로 한 순간만에 가로질렀다. 교문 밖으로 뭔가 붕 사라지자 경비원은 흠칫 놀랐다.
길게 늘어선 인도를 눈 깜짝할 새 뛰어갔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다. 차들이 정신없이 지나가는 횡단보도를 뛰어질렀다. 저 멀리에서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부아앙 들려왔다.
“뭐하는 거야!”
오토바이가 소리질렀다. 횡단보도 중간에서 한 치의 오차를 두고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소나타 한 대가 욕지기를 뱉으며 유성 앞에서 끼익 멈췄다. 횡단보도를 빠져나와 인도를 뛰었다. 눈 때문에 거리는 빙판길이었다.
아파트로 이어지는 길은 맞은편에 있지만 횡단보도는 저 멀리 있었다. 차들이 지나는 넓은 도로에 뛰어들어 달려갔다. 중앙분리대를 손으로 딛고 훌쩍 뛰어넘었다. 인도를 향해 뛰어드는데 옆으로 화물차가 치달았다. 화물차를 피하려다가 빙판길에 미끄러졌다. 인도에 산만하게 넘어지는 순간 발목이 길 턱에 세게 긁혔다. 유성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깨물었다.
정신없이 103동을 찾아 들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204호를 향해 뛰었다. 문이 열려있었다. 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너 지금 뭐 해!”
늦었구나. 유성은 욕을 씹어뱉으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방은 하나뿐이었고 거기서 다시 누가 들어도 분명한 은오 목소리가 급박하게 터져나왔다.
“싫어!”
유성은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잠겨있었다.
“김은오!”
울먹이며 집이 떠나가라 소리치면서 방문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안이 조용해졌다. 유성은 문이 아주 낡은 걸 알아봤다. 두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온 힘을 다해 비틀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