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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 - 팥쥐 자매

by 황마담
좌측이 영천 고모, 우측이 북사동 고모 사진이다.


우리 아버지에게는, 위로 4분의 누님이 계셨다.


그 중, 제일 큰 누님은 어릴 때 병으로 돌아가셨고,

셋째 누님은, 결혼까지 해서 사시다가-

어떤 연유에선지.. 목을 매고 자살하셨다고 한다.


하여, 둘째와 넷째.. 두 분의 누님만이 남았는데-


우리는, 살고 계신 지명을 애칭 삼아..
“북사동 고모”와 “영천 고모“ 라고 불렀다.




둘째인 북사동 고모는-
지역 유지의 아들과 결혼해서 꽤나 부유하셨고,

엄청 넓은 과수원도 갖고 계셨다.


그 과수원에는..

사과, 감, 복숭아, 포도 등이 있었는데-


내가 아주 어릴 때, 거기서 뛰어놀면서-

주렁주렁 열려 있는 과일들을 마구 따먹다가,

고모한테 엄청 혼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고모가 왜 혼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하지 말라니까 더 하고 싶은, 청개구리 같았는데-


지금에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흠이 있는 과일이야 얼마든지 먹어도 상관없지만,

내다 팔아야 하는 성한 과일을 자꾸 따먹었으니..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고모의 입장이

이제는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늦었지만, 정말 미안했어요. 고모... ^^;;;)




여자 형제 중 막내였고, 아버지보다는 2살 많은,

손위 누나였던 영천 고모는..


멀리 영천으로 시집을 가는 바람에,

서로 자주 만날 수는 없었는데-


딱 한번. 아버지와 함께

고모네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난생 처음 가보는 낯선 시골 동네의

아주 허름한 집 안에서 한없이 선한 얼굴의

고모 내외가 해맑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때, 영천 고모는 내게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천원짜리 지폐를

무려 3장이나 주셨더랬다.


완전 감동.... ㅠㅠ


내 평생에 맹세코! 친가쪽 친척으로부터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이었기 때문이었다.


(북사동 고모는, 흠난 과일은 그냥 먹게 했어도..

내게 용돈을 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내, 괜스레 미안해져서-

용돈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쩔 줄 모르고, 망설였던 기억도 난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왜 착한 사람들은 가난하지?"


좋아도 울고, 슬퍼도 울고-

눈물이 무척이나 많아서, 울보였던 영천 고모는..

어린 내 눈에도, 너무 선하고 착해서..

정말 바보같이 착해서, 천사 같은 콩쥐 고모였는데-


그에 반해,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고, 무뚝뚝해서-

때론 쌀쌀맞게까지 느껴졌던 북사동 고모는..


목소리도 좀 앙칼진데다가, 욕심도 많아서..
심술쟁이 팥쥐 고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로도..


어느 명절에, 오랜만에 영천 고모가

북사동 고모에게 안부 전화를 해서, 잘 지내냐고..

언니가 보고 싶다고.. 또 눈물을 흘리셨다는데..


정작 전화를 받은 북사동 고모는, 짜증을 내며..

앞으로는 전화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언니가 동생에게 그럴 수가 있냐고..

친자매 맞냐고.. 엄마와 나는 둘이 한참동안,

북사동 고모에 대한 성토대회를 했더랬다.


이 때, 잠자코 듣고 있던 동생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북사동 고모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가 대학에 합격하고, 명절에 인사갔을 때..
조용히 불러서.. 잘했다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금가락지도 하나 주셨었어.”


처음 듣는 동생의 말에..

엄마도, 나도 완전 깜놀하고야 말았다.


헉!!! 정말???
북사동 고모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다니!!!


솔직히 두 자매에게, 그녀들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서로에 대한 기억들이..

상대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만

새삼 깨닫게 되었을 뿐.




3년 전에, 북사동 고모가 돌아가셨다.


이제 아버지의 7형제 중에,

영천 고모와 아버지. 단 두 분 만이 남았다.




북사동 고모의 장례식 때.


코로나 정국이라고, 모두가 말리는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80 노구를 이끌고, 장례식장을 내내

지키시다가, 발인하고 장지까지 다녀오셨다.


영천 고모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가능해서,

참석하지 못하시고, 통화만 하셨다고 한다.


(내가 아는 영천 고모는 누워서도 3일 내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을 게다. 분명히.)




너무 안타깝게도, 이제 두 고모는

살아서는 절대 만나지 못하게 됐다.


나중에...

영천 고모가 하늘 나라로 가시게 되면,

먼저 간 북사동 고모가 반갑게 맞아주시기를…


그곳에서는 두 분이 꼭!

화해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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