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나는 종종 영혼과 육체의
타락으로 아파하며 기도를 올렸고,
위안을 얻었다.”
<프루덴티우스, 히폴리투스>
로마 시대에는,
크리스트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았기에..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가족이나 동료가 세상을 떠나면..
아무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시신을 성 밖에 있는 지하 무덤에 묻었고..
이 지하 무덤을 카타콤 (Catacomb) 이라 불렀다.
카타콤은 원래 ‘낮은 지대의 모퉁이’ 라는 뜻의,
헬라어 ‘카타콤베’ 에서 유래했는데..
초창기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피난처이자,
예배처인 동시에.. 지하 묘지를 뜻했다.
1세기부터 개종한 유태인으로 간주되었던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로마 영토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매장 되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의 바위 무덤을 연상시켰기에-
로마의 법에 어긋났으므로,
묘지는 성벽의 외부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2세기부터, 로마의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이러한 방법을 유지하되, 지하에-
공동 매장 공간을 두는 풍습을 물려받았는데..
육신은 언젠가 부활하게 되므로,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 때문에!!
공간 부족 문제가 생겨났고..
(지상의 묘지는 드물고 비쌌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지하에!!
수천 개의 좁은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크리스트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게 되자,
지하 묘지의 풍습은 더욱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좁은 지하 통로를 종과 횡으로 뚫고..
계단을 이용해서,
여러 층으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는데..
좁은 지하 미로 같은 형태에,
직분별로 묘실이 구분되어 있기도 하며..
벽면에는 물고기 그림 등..
다양한 벽화가 많이 새겨져 있었다.
보통은 돌로 된 하나의 관 속에,
부부와 가족들이 함께 묻혔다고 하는데..
단순하게 관만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이나 벽화로
주변을 꾸며 놓은 무덤도 있었고..
성 베드로와 성 바울 같은 성인들이 묻히게 되면서,
많은 순례자들이 카타콤을 찾게 되었다.
참고로, 카타콤 안에는 무려 600만 구의
사람 유골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