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가책을 다 읽는다. 요가인들의 온갖 추천과 권유와 협박에도 굳건했던 내가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돌아가며 요가책을 섭렵하기 시작했고, 이제 대출의 단계를 넘어 이 책, 저 책 구매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어느 날 갑자기였다. 과하게 먹은 저녁밥에 몸은 무겁고 종일 재밌는 일도 없어 심통이 난 날이었다. 언짢아. 이대로 하루를 끝낼 수 없어.
구석에 말려있던 매트를 깔고 절친한 요가인이 진작에 보내줬던 영상을 틀었다. 두 발을 모으고 가슴을 열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머리 위로 두 팔을 뻗었다가, 무릎을 편 채 허리 숙여 몸을 반으로 접고, 두 손으로 매트를 짚은 다음 다리를 뒤쪽으로 멀리 둔 채 사지를 곧게 펴 몸을 시옷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 다음엔 이렇게 또 저렇게.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늘리고 수축하길 반복하며 영상을 따라하다보니 땀이 줄줄 흘렀다. 몸 속 묵은 노폐물이 전부 쏟아져 나오는 기분! 허리를 숙이는 순간 땀 한 방울이 그림처럼 뚝, 떨어졌다. 이 무슨 청춘 스포츠 드라마 같은 상황?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며 모처럼 얻은 쾌를 만끽했다.
해방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과식의 무거움과 죄책감은 물론이고 요며칠 싸매고 있던 불퉁불퉁한 마음도 허허해졌다. 요가가 이런 거였어.
그 날 이후, 책 읽고 글 쓰고 주식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고 매일 저녁 요가를 한다. 난데없이 요가를 시작한 것보다 그동안 어떻게 요가를 하지 않고 살았는지가 더 신기하다.
요가를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눈을 뜨니 보였던 것이다. 기원 전이라는 아득한 시절부터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요가를 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이라도 더 잘 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하나 더. 불현듯 요가를 하게 된날 언짢았던 진짜 이유는 그 며칠 품었던 화가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몸 가득 화를 쌓아두고, 화로 퍼먹은 밥이 과했으니 불쾌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어떤 재밌는 일들이 생겼더라도 결코 웃지 않았을 것이다.
배런 뱁티스트는 『나는 왜 요가를 하는가?』에서 요가의 진정한 목적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22쪽). 숨과 숨 사이의 찰나에는 생각이 사라지는데, 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은 '생각이 곧 나'라는 동일시 현상이 깨짐으로써 생각과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라는 조언도 함께(75쪽).
또 다른 요가 수련자 마이뜨리는 『마이뜨리, 생에 한 번쯤은 요가』에서 분리 주시력을 언급한다. 주관(1인칭)과 객관(3인칭)이 분리되면서 행위와 말, 생각에 새로운 인식이 생긴다고, 분리 주시력이 높아지면 태풍의 주변에서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태풍의 눈처럼 주변의 별의별 일을 봐도 고요함을 유지하게 된다고 설명한다(27쪽). 요가 자세를 취하거나 삶을 살아가면서 아픈 이유는 '자극' 때문인데 자극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의 경계가 없기에 내가 좋아하면 기쁨이고 싫어하면 고통이라는 것이라는 문장(98쪽)은 세네 번을 되뇌어 읽었다.
땀을 쏟아가며 몸을 가벼인 한 것처럼 문장들을 읽으며 머릿속을 비웠다. 덩어리 화로 가득 차 있던 공간에 바람이 들었다. 소맷부리, 바짓단 움켜쥐고 있던 무언가들을 털어낸 기분.
요가를 시작하고 그 요원했던 체지방이 감소와 근육량 증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나는 또 다른 것들을 줄이고 늘이기 위해 애써보고 있다. 바깥 상황을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그저 자극으로 여겨보려 하면서. 기분 나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곱씹힐 때, 감정과 생각이 나 자신과는 별개인 현상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면서. 표정관리가 안 되거나 목소리가 커지려할 때 숨을 크게 쉬어보면서.
어젯밤, 땀을 흘리며 전보다 나아진 자세로 요가를 했다. 오늘밤에도 그럴 것이고 내일밤에도 그러할 것이다. 나의 가능성을 믿는 일, 나는 요가를 하며 그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