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안에 담긴 것들

『여행가방』, 수전 할런

by 이우주

여행, 좋아하시나요? 낯선 곳을 방랑하는 그 일 말입니다. 제 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곳을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역마살이 분명 나에게 이어졌다 믿고 있습니다. 가보지 못했던 곳을 찾아 떠나는 설렘이 너무나 좋고, 낯선 곳에 도착해 조금은 어색한 사람으로 길을 걷는 것도 좋고, 익숙한 곳으로 돌아와 종종 그때의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도 좋으니까요.


혹시 여행을 떠날 때, 꼭 챙기시는 게 있나요? 제가 아는 한 중학생은 아기 때부터 붙어 지내던 곰돌이 인형을 꼭 챙겨갑니다. 풍경이 좋은 곳을 지나면 가방을 살짝 열어 곰돌이를 꺼내 멋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 친구 한 명은 꼭 일기장을 가져갑니다. 비싸고 예쁜 일기장인데요, 여행일기를 남겨놓으리라 의지를 불태우지만 저녁이 되어 맥주를 한 잔 하고 나면 수다와 피곤에 밀려 일기장은 한 장도 채워지지 못한 채 다시 가방에 넣어지고 맙니다. 어떤 이는 베갯잇을 챙겨가기도 하고, 샤워 용품이나 향초를 넣기도 하죠. 누군가의 사진을 곱게 챙겨 동행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간식을 넉넉히 넣을 수도 있을 겁니다.


여행가방을 꾸리며 제가 가장 고민하는 것은 ‘어떤 책을 가져갈까’입니다. 무겁거나 진지하지 않아야 하고, 재밌게 술술 읽혀야 하지만 또 너무 빨리 읽으면 책이 동나버리니 분량도 적절해야 합니다. 물론, 들고 다니기에 가벼워야 하고 혹 분실되더라도 치명적인 타격은 없어야 합니다. 기왕이면 여행의 목적이나 여행지와 관련이 있다면 더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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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방』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출판사 ‘복복서가’가 영국 블룸즈버리 출판사의 ‘오브젝트 레슨스’ 시리즈 중 일부를 선별해 꾸린 ‘지식산문 O’ 시리즈의 첫 번째 책입니다. 이 시리즈는 우리가 주변에서 쉽고 흔하게 접하는 사물들을 소재로 삼아 흥미로운 역사부터 새로운 발견에 이르는 사고의 확장까지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펼치는 인문 에세이입니다.


수전 할런이 쓴 『여행가방』은 여행가방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 어떤 방식으로 계급과 젠더, 노동까지를 상징하게 되었는지 같은 이야기들과 여행가방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백인의 특권과 시詩의 발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자신의 여행기와 함께 담은 간결한 에세이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꾸리는지가 곧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 『짐 꾸리는 법』


여행가방에 담긴 것은 물건만이 아닙니다. 어떤 형태의 가방을 선호하는지, 가져갈 물건을 추리는 기준이 무엇인지, 물건의 목록을 미리 작성하는지, 물건을 어떤 방식으로 담는지, 언제부터 가방을 꾸리기 시작하는지 같은 모든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고 그런 이유로 나의 여행가방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가끔 세관에서 혹은 도난을 당해 누군가 내 여행가방을 열어보는 상상을 할 때면 끔찍한 기분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겠죠.


미국 앨라배마에 있는 미회수 수화물 센터엔 매일 7천 개가 넘는 물건들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여행 중 주인을 잃은 이 물건들은 판매, 기부, 폐기의 범주로 나뉩니다. 힘든 여행에서 아기가 의지했을 고무젖꼭지, 무언가에 별표를 쳤을지도 모를 마커펜, 중요한 서류를 모아두었을 종이 클립, 어쩌면 시 한 편을 끄적였을 작은 갈색 노트, 의미를 간직하려 챙겨두었던 영수증, 좋아하는 책에서 찢겨나온 종이는 모두 폐기 대상입니다. 가치 없는 물건들이니까요. 누군가의 삶을 이루고 있던 하찮은 물건들. 다른 것을 포기하고 이것들을 가방에 챙겨 넣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입니다.


여행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와 여행가방을 정리합니다. 버리고 온 것―낡은 티셔츠와 양말―도 있고 새로운 것―모르는 언어로 쓰인 읽을 수 없는 책과 여행지의 하늘이 그려진 타일 조각―을 넣어 오기도 했습니다. 한 시절의 나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던 가방을 깨끗이 닦아 원래의 자리에 가지런히 놓아둡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 여행가방을 꾸려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어쩌면 매일의 일상을 꾸려 삶을 살아가는 것과 비슷한 일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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