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사자야!』, 에드 비어
주눅 들거나 의기소침해질 때 저는 레나드를 생각합니다. 노란 사자 레나드.
레나드는 에드 비어의 그림책 『나도 사자야!』의 주인공입니다.
‘사자’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초원을 장악하는 강자, 우렁찬 포효, 폭발적인 힘, 먹이의 근육을 끊어버리는 이빨. 하지만 레나드는 그런 사자가 아닙니다. 등에 닿는 햇볕의 포근함을 즐기며, 발치의 살랑이는 풀을 느끼며 혼자 느릿느릿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새록새록 생각 언덕’이라 이름 붙인 혼자만의 공간에 올라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도 하고 나풀거리는 생각들을 흩날리기도 합니다. 흥얼거려지는 말들을 가지고 장난을 하다 시를 짓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자그마한 오리 매리앤을 만납니다. 사자를 마주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매리앤에게 레나드는 말합니다. “나는 시를 짓는 중이야. 그런데 그만 꽉 막혀 버렸어. 혹시 날 도와줄 수 있니?” 자칭 ‘감성 풍부 오리’ 매리앤은 반가워합니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낱말을 요리조리 옮겨가며 멋진 시를 완성합니다. 둘은 단짝 친구가 되고요.
그런데 다른 사자들은 이런 레나드가 못마땅합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사자다운’ 사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때를 골라 레나드를 둘러싸고 윽박지릅니다. 사자가 그렇게 부드러우면 안 돼! 사자는 사나워야 해, 으르렁거려야 해! 어서 오리를 잡아먹어! 레나드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입니다.
네 자신을 바꾸라는 말은 본래의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겠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너를 바꾸지 않으면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처분일 겁니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준다/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준다/인정한다는 뜻이다. 또는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 『사람, 장소, 환대』 207쪽, 김현경
인류학자 김현경 선생의 문장을 읽고 환대라는 것을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거창하고 특별한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이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그의 존재를 환대할 수 있다는 것이 (부끄럽게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느 시절이건 정치인들에게 만족하기란 어렵습니다만 요즘의 그들에겐 실망을 넘어 원망이 쌓여갑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정보를 퍼트립니다. 그것이 분노와 증오가 되게끔 부추겨 국민을 갈라놓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나와 다른 모습을 한 사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과격하고 저급한 언어로 상대를 공격하고 깨부수고 폭력을 저지릅니다. 서로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악마로 규정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슬픈 일이죠. 너무나도 슬픈 일입니다.
이러한 규정과 혐오, 배격과 처단은 정치 광장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겁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어쩌면 가정과 놀이터에서까지 바로 우리가 피해자였을지도, 가해자였을지도 모릅니다.
처음 직장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합니다. 여자 직장인이라면 으레 갖추어야 했던 모습-화장과 긴 머리, 치마와 구두, 웃는 얼굴과 상냥함-을 갖추기 위해 저의 타고난 성향과 취향을 외면한 채 살았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고단했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물론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양보와 인내는 하고 있습니다만, 나다움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사자가 되는 데 단 한 가지 방법만 있을까요?"
조직 안에서, 인간관계 안에서 남과 다른 나의 모습에 주눅 들고 의기소침해질 때 레나드의 마지막 질문을 떠올립니다. 부드러운 사자, 말랑말랑한 사자 레나드가 사자일 수 있는 방법은 초원의 밤하늘 별처럼 많으니까요. 우리가 우리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처럼요.
덧붙임) 『나도 사자야!』를 전국민 필독서로 지정하고 정기적으로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옳은 것을 알고 있다면 못된 정치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소용없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