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영수증』
아무도 나를 예뻐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옷 한 벌을 샀다.
스물세 살의 '정신'은 지쳐 외로웠던 2001년 8월 2일 오후 5시 30분에 76,240원짜리 원피스를 샀습니다. 2001년 10월 21일엔 500ml 서울우유를 사며 좋아했던 오빠를 생각했습다(미워 미워!). 며칠 뒤엔 병원에 갈 돈을 빌리는 게 눈물이 나 동전 몇 개를 모아 1,440원을 주고 동네 약국에서 반창고와 붕대를 샀습니다. 그해 12월엔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 푹신한 이불과 따뜻한 조명을 사고 싶었지만 그냥 노트 두 권만 샀습니다. 글을 써 가난으로부터 구조된 다음 이불을 덮고 조명을 켜겠다 마음먹으면서요.
카피라이터이자 마케터인 정신은 스물세 살부터 영수증을 모았습니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마음에 쏙 드는 책상을 선결제하고, 밀려있던 요금을 납부한 증빙 들은 기쁨과 외로움, 좌절과 씩씩함의 기록이었습니다. 마흔 살이 된 정신의 영수증들엔 낯선 언어가 찍혀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찾아 먼 곳으로 떠난 그가 값을 지불한 비행기표와 지하철 티켓, 데이팅 어플의 구독료는 그의 또다른 기쁨과 외로움, 좌절과 씩씩함입니다.
2만 5천 장의 영수증.
2만 5천 개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토요일이었던 오늘, 저의 첫 영수증은 아침 6시 30분 커피 4,000원 입니다. 오전 10시에 독서모임 10,000원을 결제했고, 오후 12시 30분엔 햇반 2,100원, 1시 40분엔 다시 커피 4,000원, 5시 30분엔 짬뽕밥 10,000원, 6시 45분엔 LPG 충전 37,108원을 결제했습니다.
훗날의 언젠가, 오늘의 결제 기록을 보며 오늘의 마음들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른 아침의 커피는 말할 수 없이 충만했지만 지난밤의 슬픔을 끌어안은 채였다는 것을. 김초엽의 소설은 너무나 좋았고 독서모임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걸 배웠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여전히 힘들었다는 것을. 속 쓰릴 걸 알면서 커피 한 잔을 더 마신 건 나한테 해코지 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짬뽕밥을 포장해주던 아주머니의 손목 보호대를 보고 식당에서 오래 일 해 손가락 마디마디 관절염을 앓는 이모를 생각했다는 걸. 가스 충전소에서 처음 보는 젊은 직원이 두 대의 차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서툴게 기계를 조작하고 카드 결제에 자꾸 실패해 울상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면 좋겠어요. 흘려보내는 게 나을 것 같은 마음들은 그냥 흔적 없이 잊히면 좋겠거든요. 하지만 그리 되지 않겠죠. 어쩌면 오래도록 무지근하게, 재밌었던 기억은 사라지고 모르는 척 하고 싶었던 마음들만 그렇게 오래 남아 있을 수도 있을 거에요.
내일은 또 어떤 마음들로 어떤 결제들을 하게 될까요. 특별한 영수증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 반, 아무 영수증도 생기질 않길 바라는 마음 반,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