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봉 Oct 09. 2024

안녕, 나의 작은 사회

12. 남자애란?



창영이는 반장이 되었다. 


누구나 다 예상했던 일이다. 

우리는 늘 반장 선거를 했다. 하지만 이건 선거가 아니다. 

북한에서나 있을 법한 선거 방법이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보는 앞에서 후보의 이름을 말하면 손을 들어 명 수를 세는 것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다시 또 유치해졌다. 

더욱 웃긴 건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는 그렇게 끝이 난 것이다. 

창영이는 내가 손을 들지 않아도 그 수가 압도적이었다.


창영이는 키가 마치 중학교 1학년 때 다 커버린 것처럼 정말 컸다. 

아마 전교에서 창영이를 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고 특히,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창영이에겐 하루에 쪽지나 편지가 책상 위에 한 가득이었으니까. 


난 그래서 더더욱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싶지 않았다. 

일부지만 인기쟁이 아이들은 친구를 중고품 대하듯 대한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난 그 애를 피해 다녔다. 

뭐, 사실 고개를 바짝 쳐들고 그 애를 봐야 한다는 게 가장 싫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야 하는 시간과 체육, 음악, 과학, 생물,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내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학년은 여자 아이들이 남자아이들 숫자의 반 정도도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앉을 때, 꼭 여자 아이들이 중간 남자아이들이 좌, 우를 차지한다. 

난 이것도 정말 맘에 들지 않았다. 무슨 축구 경기 작전도 아니고 3, 2, 3, 2 체제라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덕분에 난 좌 남자아이와 우 남자아이와 가장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지우개 따먹기 구경을 하거나, 좌 남자아이의 이름이 봉진이라서 우 남자아이 다리를 떠는 덜덜이가 봉다리, 봉다리, 하고 부르는 것을 중간에서 듣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우린 꽤 친했다. 

우리는 봉다리와 나를 말한다.


특히 난, 뭐든 얘기도 잘 들어주고 조용한 봉진이, 봉다리가 좋다. 

성격이 나와 아주 비슷했다. 낯선 건 사람은 당연했고 음식도 싫어할 정도이거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것, 그리고 영어 수업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우린 가끔 선의의 경쟁도 했다. 

그땐 내가 공부라는 것에 경쟁도 할 때이긴 했다.

영어 단어 쪽지 시험을 보는 날이면 누가 더 많이 틀렸는지를 놓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봉진이가 남자 아이라 참, 아쉽다. 

어쩌면 내 영혼을 털어 넣을 단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봉다리는 창영이와 같은 동네에 살았다. 

어릴 적부터 그 작은 동네에서 초등학교도 함께 나왔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봉다리는 창영이를 그렇게 좋은 친구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창영이는 봉다리와 굉장히 친하다,라는 얘기를 내게 쓸데없이 말했다. 


난 그 애, 그러니까 창영이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데 말이다. 

자꾸만 나를 보거나 말을 거는 저 아이에 대해, 나는 이제부터 약간의 야릇한 의구심을 갖기로 했다. 


어느새 난, 덜덜이처럼 봉진이를 봉다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덜덜이는 야 봉! 또는 봉다리,라고 불렀고, 나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봉달아, 라고 봉진이를 불렀다. 

봉진이는 내게 왜, 어, 응, 이라고 잘도 대답해 준다.


우린 좌에 앉은 짝이 되었다가, 한 달이 지나 분단을 그대로 옆으로 옮겨 갔다. 

이 방법은 담임선생의 생각이다. 그래서 난 드디어 두 명씩 앉게 되는 2 분단이 되었다.


헐, 한데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 가, 봉다리는 1 분단의 끝에 앉았고, 나는 덜덜이와 짝이 된 것이다. 

봉다리와는 마치 나의 옆에 좁은 골목길이 생긴 것처럼, 거리가 생겨 버렸다. 

그래, 한 달만 덜덜이의 덜덜 떨리는 다리를 참으면 다시 봉다리와 짝이 될 수 있다. 

봉다리와 짝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니까, 나의 키가 1센티도 자라지 않을 만큼의 한 달이란 시간은 아주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덜덜이는 봉다리와 하던 지우개 따먹기 게임을 이젠 나보고 하자 한다. 

열 번을 말하면 열 번을 졸라 대는 말을 하는 탓에 나는 결국 넘어가 버렸다. 

남자아이들이나 하는 따 먹기 게임을 내가 하다니, 난 그래서 친구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덜덜이의 필통에는 가지 각색의 지우개가 있다. 

그 속에는 나의 분홍색 지우개도 잡혀 있다. 

이 놈은 꼭, 지우개를 따 먹게 되면 단 한 번만이라도 필요할 땐, 빌려줘도 될 것을 절대 빌려주지 않는다. 

나의 눈치 빠르고 친절한 봉다리는 좁은 골목길 위에 긴 팔을 뻗어 하얀 지우개를 말없이 빌려주었다.

 

담임의 수업 시간이었다. 

봉다리와 나는 쪽지를 주고받았다. 

우린 절대 너희들이 생각하는 어떤 남자, 여자 친구의 관계가 아닌 진짜 친구로서, 아주 잘 지냈다. 

쪽지의 내용은 며칠 후 봉다리와 나는 짝이 되는데, 내가 덜덜이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을 봉다리는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봉다리는 우리가 짝이 되면 자기가 오른쪽에 앉겠다는, 뭐, 그런 아주 친절한 내용이었다. 


이건 영어 수업 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난, 봉다리에게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했고, 또는 고맙다는 말과, 덜덜이와 지우개 따 먹기는 다신 하지 말라는 글을 적었다. 

선생이 필기를 하는 동안 난, 팔을 뻗어 봉다리에게 답장을 건넸다. 

앗, 하필 그때 선생이 뒤로 돌아보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또한 창영이와 눈도 마주쳤다. 


난 속으로 외쳤다. 젠장 젠장 젠장. 

쪽지는 다시 내 손안에 있었고 선생은 내게 다가와 쪽지를 빼앗아 갔다. 이곳은 북한이다. 

그리고 선생은 말했다.


“수업 끝나고 보자.”


이건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나의 담임은 불 같이 화가 난 얼굴이었다. 

요즘 연애 사업이 잘 안 되는 건지, 아니면 벌써 히스테리를 부릴 나이인지, 평소 담임 같이 않게 밴댕이처럼 굴었다. 


“우리가 약속을 했으면 그렇게 해야 지, 왜 너희들 마음대로 바꿔?
그리고 친구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이렇게 둘이 쪽지를 돌려 보는 건 정말 잘못된 거야"


정말 이상했다. 

첫째, 한 달에 한 번 자리를 바꿔 앉는 건 선생의 일방적인 명령이었고 우린 약속한 적이 없다. 

둘째, 우린 덜덜이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적은 적도 없다. 

그저 봉다리가 덜덜이 옆 쪽에 앉겠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선생은 정말 우리가 덜덜이를 외톨이로 만들려고 한 사람인 냥, 우리를 대했다. 

그리고 우리의 쪽지를 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건 잘하는 일 인가? 

우리는 지금도 나중도 덜덜이와 잘 지낼 생각인데 오히려 선생이 거리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린 그렇게 담임선생의 말 한마디로 나쁜 아이들이 되어버렸다. 


청소가 끝난 후, 우린 집에 돌아가지 못했고, 선생은 봉다리와 나에게 운동장을 열 바퀴나 돌고 가라고 했다. 그리고 운동장을 뛰면서 반성을 하라고 말한다.

이건 분명 담임선생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저 큰 운동장을 열 바퀴를 뛸 만큼 우리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아, 차라리 수업 시간에 쪽지를 교환하는 건 잘못된 거라고 우리에게 말했다면 난, 단숨에 그것을 인정하고 운동장을 20바퀴 뛰겠습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 날 나는 선생의 의도가 뭔 지 궁금했다. 


봉다리와 난, 운동장을 뛰었다. 

한 바퀴를 뛰는 그 순간, 나는 너무 숨이 너무 차, 어지럼증을 느꼈고, 덥기 시작한 날씨였기 때문에 쨍쨍한 해는 우리를 더욱 괴롭혔다. 

봉다리는 벌써 두 바퀴를 뛰어와 내 옆에 나란히 줄을 맞추었다. 

나는 괜히 착한 봉다리에게 짜증을 부렸다.


“옆에 있지 마"


“같이 뛰어"


“더 혼난다니까, 가 봉다리"


봉다리는 미련도 없이 또 반바퀴가 차이 나도록 뛰었다. 

나는 네 바퀴가 되고 나서야 나만의 리듬을 찾았다.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정해진 보폭으로 발을 디디며 두 팔을 맞춰 뛰었다. 

아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때 차오르던 숨이 차분해지면서 구름 위라도 걷는 듯, 편안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이지? 

정말 신비한 경험이었다. 난 그때 생각했다. 

이건 정말 진심으로 심각하게 생각해 볼 만한 문제였다. 

아, 내가 마라톤 같은 종목에 소질이 있는 걸까? 

난 열 바퀴를 뛰고도 한 참을 더 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거짓말 같겠지만 난 정말 힘이 들지 않았다. 난 내가 잘할 수 있는 체육 종목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홀로 뛰는 건 아주 적막하고 쓸쓸하다. 

뛰기보다 난, 이 조용함을 좋아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아주 신비한 경험이었지만 이 기분 좋은 체육은 여기까지가 딱, 끝이었다.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이건 나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이땐 아마도 봉다리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운동회나 체력장 같은 것을 할 때, 왜 내가 이런 뜀박질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왜 뛰는 것도 공부처럼 일등 이등을 가려내야 하는지 어른들의 교육 정책이 한심해 보이기만 했다. 

결국 난 백 미터 달리기도 그냥 걸어서 도착했다. 

그깟 공책 몇 권, 연필 몇 자루, 색종이 따위의 선물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하, 뜀박질이 체질에 맞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완벽한 착각이지 않은 가.

그저 봉다리 때문일 것이다. 


봉다리는 그때 나 때문에 네 바퀴는 더 뛰었다. 

열 바퀴를 뛰고 그냥 가도 되는 것을 그놈의 친절한 의리는 기어코 나를 감동시켰다. 


봉다리와 나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담임선생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봉다리가 나 보다 훨씬 담임을 더 미워했다. 

우린 더 이상 단어 쪽지 시험을 보고 틀린 개수에 관해 말하지도 경쟁하지도 않았다. 


이후, 나의 영어 실력은 계속 바닥을 치고 있었다. 

뭐, 선생도 더 이상 내게 성적이 내려가서 어떡하니,라는 말과 걱정도 하지 않았다. 

우린 그렇게 선생과의 거리를 더욱 멀게 아주 멀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 사춘기가 시작된 우리의 반항심과 연결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봉다리는 영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다. 나처럼 유치한 선택을 하지 않은 봉다리가 이제 와서 더 대단해 보였다. 

늘 선생 앞에서 봉다리는 우쭐하는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누가 뭐라 해도 배울 점이다. 


나는 운동장을 돌고 봉다리와 교실로 돌아와 집에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창영이가 아직 교실에 남아 있었다. 

봉다리를 기다렸나, 앗, 이게 뭐지? 얘가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다. 

나를 기다린 것이다. 

창영이가 물었다.


“괜찮아?”


맙소사, 이 아이가 설마…        


  



          

우린 아주, 정말, 몹시, 내가 미칠 지경이 될 정도로 어색함을 두른 체 셋이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난 봉다리와 마른 목을 축이며 먹쇠바(아이스크림 이름)를 사 먹을 생각이었다. 

주황색의 오렌지 맛이 나는 그 아이스크림은 나의 단짝 영주와의 추억 속으로 빠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먹쇠바는 나에게 영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창영이가 나의 계획을 망쳤다. 


난 죽어도 싫은 중간에 끼임, 상태를 다시 겪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계속 걸었고, 봉다리는 갑자기 속도를 내더니 뜀박질을 하며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 간다 내일 봐"


봉다리는 내게 인사를 건넨 것이지, 창영이에게 인사를 건넨 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정말 창영이가 말하는 것처럼 봉다리는 창영이와 친하지 않았다. 

봉다리는 행동으로도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봉다리는 그런 아이다. 

아니 우리는 서로 믿음이 있는 친구였으니까 당연했다. 


나는 창영이가 나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는 게 싫었다. 

나는 굵은 무 다리가 아닌 가, 점점 더 상체와 반비례가 되어가고 있는 나의 하체가 나를 고달프게 만들었다.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창영이가 먼저 계단을 올라가길 기다렸다.


“왜?”


아, 저 녀석의 자꾸만 계속되는 물음에 대답하기가 너무 귀찮다. 

아니, 사실 눈을 마주치기가 너무 싫었다.


“먼저 가"


“왜? 안 가?”


하, 정말 귀찮다. 저 큰 키를 올려 보며 고개를 제치며 말하는 건 더 힘들지 않은 가.


“가 갈 거야”


창영이는 이상하다?라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나처럼 멈춰 있었다. 

아 정말 미쳐버리는 순간이다.


“올라가라니까?”


내가 꼭 굵은 나의 종아리와 큰 엉덩이를 보여주기 싫어서 너 먼저 올라가라는 거야,라고 말해야 되니?

이 키 크고 공부 잘하고 깔끔하기까지 한 녀석아. 


내 속의 말을 들었는지 녀석은 먼저 계단을 올랐다. 

오늘 과외 역시 난, 뭘 배웠는지 알지 못한다. 봉다리가 손 흔드는 모습이 몹시 걸렸다. 

난 뒤늦게 봉다리가 왜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건지 알게 됐다. 

이건 모두 다 이 놈 때문이었다. 

이 놈이 또 나를 부른다.


“너 일요일에 뭐 해?”


“응, 뭐 하겠지"


갑자기 창영이가 크게 웃었다. 

나는 웃기지도 않았고 그냥 자꾸 내게 말을 거는 얘가 짜증이 날 뿐이다.


“같이 놀러 가자"


와, 이젠 내게 같이 놀러 가자는 말을 한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의 착각이라도 어쩔 수 없다. 얘가 날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알았다,라는 말을 하면 뭔가 시작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봉다리의 손 흔드는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일요일에 뭐 한다니까?”


“뭐 하는 데?”


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봉다리, 봉다리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것이다.


“봉다리네 집에 가"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나는 이 날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했다. 

창영이의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되어 버렸고, 알았어,라는 말을 했지만 표정은 왜? 왜? 뭐 하는 데?라고 자꾸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은 표정이다. 


고난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봉다리와 나는 짝이 되었다. 그런데 봉다리가 달라진 것이 아닌가, 봉다리가 여자였다면 나는 분명 영혼을 털어 넣을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봉다리는 꼭 필요한 말만 나에게 했고 영어 시간이 되면 선생의 눈치까지 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봉다리가 책상을 자로 재 더니, 반으로 선을 긋는 것이 아닌가. 

봉다리는 이런 유치한 짓을 할 봉다리가 아니다. 

분명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나는 정색하며 물었다. 

아니 반쯤 울먹였던 것 같기도 하다.


“봉다리, 너 왜 그래?”


나의 말을 무시하고 대답도 하지 않은 봉다리에게 나는 너무 화가 났다. 

나는 질 세라 그어 놓은 금을 더욱 진하게 매직으로 그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만 넘어오기만 해 봐, 가만두지 않을 테다. 


난 교실을 잘 벗어나지 않는 아이지만, 더 이상 봉다리와의 이 어색함을 안고 그대로 앉아 있기 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난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그 눔의 징글징글한 쪽지를 또 썼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쓴 건 아니다. 

아니, 솔직히 그런 생각도 했다. 다시 담임 수업 때 쪽지를 써서 담임을 욕하는 글을 들켜 버리는 거다. 그렇다면 봉다리와 난, 다시 방과 후, 운동장을 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왜 봉다리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건지 묻고 싶은 건가? 

이건 집착이 아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달라진 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당연히 걱정이 되는 법이다. 나는 쪽지를 봉다리의 필통 속에 넣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반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렷, 경례"


췟, 차렷, 하는 것까지는 이해다 된다. 

정말 하기 싫은 경례, 무슨 경례 람, 이상한 학교는 이상한 규칙이 꼭 있다. 


난 교련이라는 과목이 싫었다. 이 선생은 미친개 보다 더 무섭다.

미친개는 그냥 무서운 선생이라 치면 교련 선생은 방금 막 수감 생활을 끝낸 죄수처럼 눈빛이 무섭게 들끓었다. 갑자기 선생은 미리 얘기도 해 주지 않고 체육복을 갈아입으라고 한다. 

십 분 안에 운동장에 모이라고 하는 것이다. 

봉다리가 내 쪽지를 읽어야 하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인지,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아이들이 이 선생을 무서워했다.

아이들의 재빠른 동작을 보면 모두가 이해된다. 

단 한 명의 시간 낙오자도 없이 우린 십 분 전에 모두 운동장에 모였다.

 

오늘 수업은 정렬해서 걷다가 좌향 좌, 좌향 우, 발 바꿔 걸어, 뒤 돌아, 뭐 이런 걸 익히는 시간이다. 

설명을 하려 하니 난 웃음이 나와 손가락이 간질거린다. 우린 네 줄로 맞춰 선생이 불러주는 대로 행동을 바꿔 걷는다. 하지만 꼭, 헷갈린다. 좌향 좌, 에서 좌향 우를 말할 땐 꼭, 한 명씩 반대로 걷는다. 

그중에 꼭 나도 포함이 된다. 

갑자기 선생의 나무 봉이 내 어깨를 툭, 하고 지나갔다. 

세상에 불빛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아팠다.


“아얏"


이 소리는 아주 반사적인 것이다. 이렇게 뜨겁게 아픈데 어떻게 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이지? 

그때 난 봉다리와 눈이 마주쳤고, 봉다리가 나를 보는 눈빛에서 나는 안도감을 찾았다.

봉다리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악, 선생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가 악, 소리를 내나"


이곳은 군대 인가,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어야만 하는지 그 자리에 멈춰서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난 공부를 하러 붉은 성에 온 거지 좌향 좌를 걷다가 우로 발을 바꾸고 다시 뒤돌아 걷는 걸 배우러 온 게 아니란 말이다. 나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우린 자연스럽게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나 백 일을 치른 후, 뒤집기를 성공시키고 네 발로 기다가 엎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두 발로 걷기를 완성한다. 

그리고 빨리 걷기, 그리고 뛰기 그리고 오른쪽 왼쪽, 뒤로 가기,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다. 

근데 왜 이런 교육이 필요한 거지? 


아씨, 군대에 가는 남자 어른이나 배우면 되는 거 아닌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군대를 가서 배우면 그만 인 것을, 이 어린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안겨준다 니, 이게 교육인가? 

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싫었던 이 학교 란 곳이 난, 너무 싫었고 절망스러웠다. 

정말이지 이 붉은 성을 탈출하고 싶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영주를 따라 갈수만 있다면 난, 영주와 함께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고 싶다. 

그곳은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야 한다 거나, 좌향 좌, 우, 발 바꿔 가, 이 따위 건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다시 엄마의 배속으로 들어가,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엄마 배 속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다. 


수업이 끝난 후, 난 다시 교복으로 갈아 입으며 어깨를 확인했다. 

그 사이 동그랗고 작은 멍이 들었다. 그걸 보니 아파서도 아니고 내가 이 수업을 3년 내내 들어야 한다는 것이 기가 막혀서 눈물이 돌았다. 


봉다리의 눈치가 심각하다. 

교실로 들어오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내가 넣어 둔 쪽지를 읽은 것 같았다.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난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다시 기운을 차렸다. 

아, 봉다리의 꿰맨 줄 알았던 입술이 말을 한다.


“너 괜찮냐?”


이 말 한마디를 들으니 삼 년 동안 교련 수업을 들어도 참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뭐"


“어? 울었네?”


“아니거든?”


봉다리가 기분 좋게 나를 놀렸다. 그리고 무심하게 휴지를 건네주었다.


“에 울었네 뭐"


나는 봉다리의 팔뚝을 주먹으로 툭, 툭 건드렸다. 

또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아서 창문 쪽의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나의 눈이 찔끔한 건 아파서가 아니라 봉다리를 찾은 기쁨의 것이었다.

이것으로 됐다. 난 더 이상 바라는 소원이 없다. 

아메리카 드림 따위, 이젠 필요 없다. 금발의 엄마 배속도 말이다.


나는 내가 바라는 대로 일 년 반 동안 다니던 과외를 그만두었다. 이유는 나의 영어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 때문은 당연히 아니다.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의견은 듣지 않지 않은 가. 

그저 과외 선생이 이사를 간다는 이유에서 다. 

칫, 그렇다.

나머지 셋, 아이들도 과외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 난 자연스럽게 창영이와 얼굴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다. 


봉다리는 자기 입으로 말하기 싫다며 내게 아주 긴 쪽지로 답을 했다. 

연습장을 대충 쭉, 찢어 모양도 이상한 사다리꼴 모양의 정리되지 않은 종이게 길게 적혀 있었다. 


창영이가 일요일, 그러니까 내가 봉다리의 집에 갈 거라고 거짓말을 했던 그날, 그날에 창영이는 봉다리에게 전화를 했고 집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봉다리 집의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창영이는 나를 먼저 찾았다고 한다. 

난 그 쪽지를 읽으면서 심장이 쿵닥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 

당연히 봉다리는 나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없다고 말을 했고, 창영이는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창영이는 뭐가 모자라서 그 덩치에 지 반 만한 봉다리 앞에 세 명의 친구를 함께 데리고 간 것일 까? 

비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조용히 봉다리를 보며 나에 관하여 말을 뱉었다.


“우재는 내가 먼저,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어
 너는 그때 우재 몰랐지? 그리고 내가 우재를 좋아해, 너는?”


봉다리는 그 답을 내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영이는 다시 친절함을 찾으며 자신을 우재와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건,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의 것이었다고 봉다리가 말했다. 

봉다리는 무서워서 가 아니라 끼어들기 싫다,라고 내게 정확히 의사를 전달했다. 


덩치 큰 녀석이 다른 남자아이들 셋을 데리고 온 것도 그렇고 창영이는 굉장히 유치한 아이라고, 그리고 아주 복잡한 아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엔 봉다리가 이상한 말을 했다.


“네가 좀 친하게 지내, 그럼 되지"


“뭐? 내가 왜?”


“난 괜히 피해 보기 싫어"


이런 이기적인 녀석이 있나.

봉다리가 다시 말했다.


“다 같이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다 같이 친하게 지내기는 힘들어
 그리고 창영이는 무서운 게 없는 애야"


나는 그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린 적이 없다. 

그렇다. 우리의 이 작은 사회에서도 이런 잡스러운 권력이 난무한다. 난 그제야 봉다리의 말을 이해했다. 

난 봉다리를 정말 좋아했고 봉다리가 그 어떤 일로도 상처를 받거나 넘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조금씩 사이가 멀어졌다. 

아니 내가 그렇게 해야만 했다. 정말이지 이건 막장 드라마나 다름없는 작은 꼬마들의 사회이다. 

봉다리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어쩌다 봉다리와 눈이 마주치면 우린 아쉬워하는 눈빛을 서로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봉다리도 그랬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담임선생은 또 자리를 앉는 방법을 바꾸었다. 또 담임 혼자 한 약속이다. 

그래 놓고 우리가 한 약속이라고 또 같은 말을 늘어놓을 것이다. 

어른들은 그렇게 거짓말로 말을 늘 포장하고 그것이 마치 우리가 한 약속인 것처럼 꼭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난 그 점이 아주 진저리가 난다. 하지만 따를 수밖에 없는 게 작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린 이제부터 등교를 하는 순서대로 자리에 앉게 되었다. 

반가운 소식은 내가 함께 앉고 싶은 짝이 있다면 시간을 맞추면 되는 것이다. 

또는 옆 자리를 맡아 놓는 아이들도 있다. 그것은 조금이나마 우리의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난 늘 그랬듯이 봉다리와 짝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약속된 건 아무것도 없다. 

봉다리와 하루 세 마디 정도면 아주 많은 대화를 한 것이 되어버린 지금, 난 내 입을 저 녀석처럼 꿰매고 싶었다. 모두 나의 거짓말로 시작된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지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학교에 일찍 가고 싶지 않다. 

늘 일찍 등교하는 봉다리의 옆자리를 당연히 난 앉고 싶어 질 테니까. 

차라리 다른 아이가 봉다리의 옆을 앉아 있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요즘 나의 생활은 참, 이렇게 복잡했다. 


눈부신 햇살을 좋아하는 나는 1 분단을 선택했다. 

처음 봉다리와 짝이 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간이 아닌 맨 왼쪽 자리다. 

뭐, 앉아 보니 그리 나쁘진 않다. 난 창밖만 계속 보았다.


봉다리가 어디 있는지 찾을 나의 눈이 의심스럽고 창피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타닥, 콰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앞자리에 누군가 신발주머니를 던졌다. 

창영이다. 창영이가 바로 내 앞자리를 맡았다. 갑자기 숨이 막힌다. 

내 옆자리와 그 옆자리는 창영이와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맡았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창영이가 난 조금 무섭다. 


모른 척, 하고 난 계속 창 밖만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봉다리가 내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는 척하지 않아도 봉다리는 내 걱정을 했던 게 분명하다. 

이런 멋지고 또 멋진 녀석 같으니라고. 나의 뒤는 참 든든하다.


나는 봉다리 말처럼 자연스럽게, 수도 없이 뒤돌아보는 창영이와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창영이는 얼굴에 붉게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인지 내게 말을 걸 때는 얼굴을 똑바로 들지 않고 말을 했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계속 보기라도 하면 창영이의 얼굴은 정말 빨개진다. 


얘도 보면 참, 나처럼 복잡하게 산다,라는 생각이 든다. 

봉다리는 시간이 갈수록 나의 뒤에 앉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거나 나와 말을 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어쩌다 자신도 모르게 나를 불렀다가도 이내 입을 꾹 닫아 버렸다. 그러고 보니 봉다리에는 입이 없는 게 맞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내가 기다린 시간이다. 궁금하겠지만 봉다리도 창영이도 안 봐도 되는 날이 된 거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성당에서는 여름 성경 학교라는 것을 한다. 

앞서 말했지만 원하든 원치 않든 가야 하는 것이다. 이번 캠프는 굉장히 규모가 컸다. 

우리 동네는 물론 도시의 성당을 다니는 아이들까지 포함이다. 

말하자면 중, 고등학생이 모이는 대대적인 성당 캠프다. 왜 이런 걸 해야 하는 건지, 적응하기 힘든 것 태산이다. 이 어린 나는 벌써부터 뒷골이 댕기고 있었다. 


방학 중인 틈을 타, 산속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캠프가 시작되었다. 

반을 나누고 조를 나누고, 모두 다 처음 본 언니, 오빠들이다. 역시 난 막내다. 

나는 우정이를 종종거리며 따라다니고 싶었지만 조가 다른 이상 함께 다니는 건 무리다. 


이 캠프는 대체 자립심을 기르기 위한 건지 협동심을 기르는 건지 도통 목표를 모르겠다.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세상은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시간표에 적힌 대로 우리 조 여덟 명은 주어진 것들을 했다. 

나는 밖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아직 무서웠고, 덕분에 조원들에게 의지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겨우 하루 잠을 자는 것이지만, 아직 밤이 되려면 손가락을 꼽아야만 한다. 

나는 계속 두리번거리며 언니 우정이를 찾았다.

우연히 찾기라도 하면 달려가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싶지만 쟤는 참, 어디를 가도 사람들과 잘도 어울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늘 미소를 보여 준다. 


드디어 해가 사라졌다. 기다리던 달이 떴고 주변은 캄캄했다.

에? 아니, 뭐라고? 이런 맙소사, 갑자기 사회자가 하얀 종이를 내밀며 각자의 이름을 쓰라고 말한다. 

이제는 마니토를 뽑는 단다. 


성경에 대해서 저기 높은 곳에 있는 신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마니토를 뽑는다고? 

난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내일 12시까지 마니토를 위해 한 가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고 했다. 

편지나 선물도 좋다고 한다. 단 하나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 봐라, 처음 보는 사람을 마니토로 뽑고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고 편지를 쓰거나 선물을 주라니, 이것도 어른들의 작전일 테다. 


맙소사, 대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길래, 우리들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는 걸까, 난 내 마니토에게 해 줄 게 없다. 아니 뭔가 하고 싶지가 않다. 누구인지 알 게 라도 해 주면 모를 까, 난 이곳에서 아는 사람이라 고는 우정과 성당 친구들이 다다. 


하, 뽑은 이름을 보니 남자 이름이다. 맙소사, 남자라니. 

붉은 성에서의 두 남자도 난 이렇게 고되고 힘이 드는데, 욕이 나왔다. 

난 다시 두리번거렸다. 가슴에 차고 있는 명찰을 보며 같은 이름을 뚫어져라 찾았다. 


하느님은 기분이 굉장히 나쁠 것 같다. 여름 성경 학교에서 짝짓기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난 조원들에게 그 이름을 묻고 물어 나의 마니토가 누구인지 결국 찾아냈다. 

나는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창영이가 그곳에 와 있는 줄 알았다. 창영이가 스스로 성당을 나오긴 했지만 이런 곳에는 부모님이 반대해서 오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쭈그리고 앉아서 걸었다. 

정말 다행이다. 창영이가 아니다. 그냥 비슷한 키와 덩치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됐다. 난 편지만 속된 말로 갈기고 잠에 들 거다. 

정말이지 귀찮은 캠프다.


우린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만 했다. 

대체 누가 시간표를 계획했는지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여름이지만 산속의 아침 6시는 쌀쌀하기만 했다. 

얼굴을 씻기 위해 우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사용해야만 했다. 멀쩡한 수도가를 두고 왜 이래야 하는지, 이렇게 하면 우리가 굉장히 자연 친화적인 아이들로 클 수 있을 거라는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이지 싶다. 

오히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가야 하는 심정에는 반항심만 더 키워줄 뿐이다. 


난 나보다 더 위쪽에서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면 난, 그 아이들이 뱉는 양치 물과 눈곱을 떼어 친절하게 물에 헹구는 모습을 보았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법, 아래 있는 나는 그 물을 써야만 한다. 

운 나쁘게 나의 입 안에 그들의 것들이 들어간다면, 이건 대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흔들며 화장실로 향했다. 

차라리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수돗물을 쓰는 게 낫다.

그래서인지 난 지금도 계곡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내게 심어준 또 하나의 트라우마다. 

그 누구가 책임을 져줄 것이냐, 말이다.


나는 지금 굉장히 사기가 높은 군인과도 같다. 

그 누구도 나의 발걸음을 제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화장실 세면대 앞은 나와 같은 아이들이 몇몇이 보여 나는 훗, 하며 속으로 웃었다. 


우린 오전 일정을 치열하게 마치고, 정해진 대로 피구 게임을 시작했다. 

죽기보다 더 싫은 것이 체육이다. 더군다나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야 하는 이것이 난 더욱 싫었다. 

나의 몸은 체육, 이라는 것에 적합한 몸이 아니다. 반응 또한 굉장히 느린 편에 속했다. 

뭐, 봉다리와 운동장을 함께 뛰었던 것처럼, 봉다리가 곁에 있다면 문제는 달라지지만 말이다.

그리고 난 우선 공 이란 것을 무서워한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난 내 몸을 피구에 양보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건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들었으니까 조금만 열심히 해 보기로 했다. 


우리 조원들은 마치 피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날아오는 공을 잡아 상대방 아이의 배를 공격하거나, 머리 통을 비껴가거나 때론 땅볼로 발을 맞추거나, 거의 신들린 움직임과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어찌나 과격하고 찌르는 듯한 괴물의 소리였는지, 상대방은 그 소리에 기가 먼저 죽은 듯해 보였다.


어쩌다 우리가 공격을 받을 땐 그 날렵한 몸으로 공을 탁, 하고, 잡아 아주 빠르게 상대방 아이를 네모 박스에서 치워 버린다. 정말이지 대단한 조원들이다. 그들의 눈 속이 이글거렸고 입술은 앙 다물며 몸에서는 쒸익 쒸이익,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난 그들 틈에 숨어 기생충처럼 붙어 다니며 이리저리 피하며 눈에 띄지 않으려 애를 썼다. 

난 정말 얼굴이 화끈거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요리조리 샤샤삭, 사사삭, 하다 보니 나 홀로 그 네모 박스에 남아버렸다.


아뿔싸, 나의 공포는 공에 맞을까 겁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조원들의 기대에 찬 눈빛과 내가 뽑은 또는 나를 뽑은 그 마니토 녀석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이 더욱 무서웠다. 이건 숙명과도 같았다. 난 살아남아야만 했다.


으아아악, 공이 날아왔다. 

나는 발을 좌, 우로 사사사삭, 움직이며 마치 무술을 연마한 사람처럼, 또는 손오공이 하늘을 날아오를 때처럼 공을 피했다. 아, 기회가 왔다.

이 무서운 공을 나는 마치 떠오른 호빵을 받아 내는 것처럼 받은 것이 아닌가, 그래 좋다. 

나는 오늘 홀로 살아남겠다. 

난 금을 그어 놓은 가장자리에서부터 대각선으로 있는 힘껏 뛰어 상대방의 홀로 남은 자그마한 그놈을 조준했다. 내게 이런 용기 있다고? 와 내가 생각해도 뒤로 넘어갈 일이지 않은 가. 

나는 마음으로 생각만 해도 용기가 불쑥, 튀어나올 이름, 영주의 이름을 불렀다.


‘김 영 주우우우'


나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환호성을 퍼부었다. 

나는 질끈 감은 눈을 뜨고 눈앞의 현실을 확인하며, 또는 만끽하며 웃었다. 방금 알아차린 건 내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고 있다는 것, 나의 얼굴은 여전히 후끈거렸고 그때부터 나는 아주 유치하기 짝이 없는 불사조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난, 어쩔 수 없이 캠프 내에서 눈에 띄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도 저 멀리서 몸을 팔랑거리며 달려와 내 귀에 대고 칭찬의 말을 떠들어댔다. 

이제 드디어 마지막 내가 기다리던 시간이다. 

아니,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것보다, 이 시간이 마지막 시간임을 기다렸다는 뜻이다. 


나는 유명인답게 우선 가만히 서서 마니토를 기다려 보았다. 

그 사람이 점점 다가온다. 이 심장은 나에게 창피하지도 않은 지 계속 벌렁대고 있다. 간 밤에 종이게 갈겨 댄 편지가 생각났다. 저 사람은 내게 편지를 받고 내게 초콜릿을 선물했지만 나는 초콜릿을 싫어한다. 

내가 무슨 아직 초등학생인 줄 아는지. 


나는 자꾸만 그 사람을 그 남자라고 부르게 된다. 왜냐면 정말 성인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웃는 모습은 또 어찌나 상냥한 지, 처음 창영이를 봤을 때 녹색을 머금은 싱그러운 모습과도 비슷하다. 

잠깐, 내가 왜 자꾸 긍정적인 생각으로 창영이를 떠올리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애써 웃어 보이려고 입술을 올리려고 노력을 했지만 좌, 우의 입꼬리는 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씰룩거리며 덜덜 거리는 지 모르겠다. 


“우재 맞지?”


헉, 목소리가 서태지 같다. 

이것 하나로 모든 것은 끝난 거다. 그렇게 싫었던 일들이 반전의 긍정을 이루다니, 새삼 놀랍다. 

앗, 가만 생각해 보니 편지의 내용이 생각났다. 

큰일이다. 난 쥐구멍을 찾아야 했다.     


『나는 그쪽 마니토, 그쪽도 내 마니토?

그럼 내일 봅시다』


난 이 편지의 내용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생각이 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등은 굽어지고 손은 오그라들 것이다. 이 정성 없는 편지를 받고 서태지는 과연 웃었을까 찡그렸을까?


“뉘에에"


“반가워 난 김 충 현"


세상에 나를 보자마자 반말을 하고 있지만 난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 이 목소리는 서태지의 목소리란 말이다. 

난 서태지 노래 좀 불러줘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 사람은 정말 내가 붉은 성에서 또는 성당에서 보았던 그런 남자아이들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뭔가 굉장히 조용하고 부드럽고 멋있다. 

내 입에서 드디어 멋있다,라는 말이 나왔다. 

이제 나의 이런 고단한 학교 생활도 점점 괜찮아질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이제 난, 뭔가 달라질 것만 같으니까.


“산책할까?”


세상에, 산책이라니 어쩜 이런 단어를 쓰는 사람이라니, 자꾸만 달달하고 자꾸만 침이 나온다. 

이 말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나오는 대사이지 않은 가, 나는 숙녀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햇살은 오늘따라 더욱 눈이 부신다. 

아주 짙은 녹색을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짙은 녹색의 밭고랑, 그리고 그 사이로 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새소리, 바작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반짝이는 햇살이 그것들을 비추면 모차르트의 오케스트라도 부럽지 않다. 


이 사람은 마치 그곳을 나를 위해 먼저 걸어 봤던 사람처럼 걸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만큼, 나는 쭉, 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내 힘이 들었지만 그 시간이 좋았다. 

좁은 길을 걷다 끊어진 길에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론 불사조인 나는 그 길을 씩씩하게 잘 넘어갈 수 있다. 

이 사람은 말없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사람은 무례할 정도로 예의가 바르다. 

너무 무례할 정도로 예의가 발라서 나는 덜덜이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 용납하기 힘들 정도의 예의 바른, 이 무례함이 난 좋았다. 

그리고 베토벤의 운명이 웅장하게 귓가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 당연히 내게 내민 손을 나는 잡았다. 

마니토의 손바닥 위에 나는 손을 살짝 걸쳤고, 마니토는 내 손을 긴 엄지 손가락과 검지, 중지 손가락으로 잡고 끌었다. 


끊긴 길을 펄쩍, 거리는 내 다리가 숭구리 당당을 외쳤다. 

우린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단, 하나의 목소리


“우리 자주 보자"


라는 이 목소리만이 내 머릿속에서 동동거린다. 

캠프의 마지막 행사를 마치고 우린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우리의 성당은 그 성당, 그러니까 충현이 오빠가 사는 그곳의 성당을 말한다. 

그 성당과 왕래가 잦았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 충현이 오빠가 사는 곳의 성당까지는 거의 40분이 걸린다. 

우성이가 통학을 하는 곳과 같은 지역이다. 


아, 너무 속도가 빨랐던 건가? 

난 이미 마니토를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빠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오빠라고 부른 것이다. 

아직도 오글거리는 감이 있긴 하지만 단어는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써야, 세종대왕 님이 대견스럽다 할 거다.


나는 여름 방학이 지속되길 바랐다. 

오빠는 내게 편지를 썼고, 나도 오빠에게 편지를 썼다. 

우린, 그래 우린 우리다. 

우린 가끔 전화 통화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정이와 충현 오빠의 형과 친구라고 한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는지, 캠프 때 언니와 형은 꽤 친하게 되었고 꾸준히 연락도 했다고 한다. 

물론 충현이 오빠에게서 들은 얘기다. 그런데 우정이는 그 사실을 내게 비열하게 감추고 있었다. 


나와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지만 정말 거대해 보였던 충현 오빠는 정말 든든한 어른이었다. 

내 또래 여자 아이들은 대게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 또는 남자아이들은 여자 친구를 사귄다. 

그리고 1일 50일 100일 이 따위를 챙겼다. 


오빠와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난 왜 꼭, 사귄다는 전제를 두고 만나야 하는지, 그걸 잘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나의 성격을 충현 오빠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린 꾸준히 변함없이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충현과의 만남은 아주 작은 떨림과 안정감, 그리고 지속성이다. 

남자아이란, 이제 내 곁에 없다. 

약간의 성숙한 남자만이 있을 뿐. 나의 경계와 또는 친절함은 그것으로부터 갈라진다.


아, 이런 잊고 있었다.

사실 좀, 좋아했던 나의 봉다리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