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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수 Apr 30. 2022

단편 소설 1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수필같은 연애 이야기

여기 박 모 양이 있다. 밤 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머리칼에 옷장에는 온통 무채색 계열뿐이다. 야행성인 그녀는 아침을 잘 챙겨 먹지 못한다. 화장하는 동안 우엉차를 끓여 삶은 달걀 두 개와 함께 먹는 것이 전부다. 그래도 요즘은 고향 과수원에서 제철 사과 한 박스를 보내 후식까지 생겼으니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어느 수요일, 평소보다 출근 준비를 일찍 마친 그녀는 사과를 먹기 위해 식탁에 앉으려다가 냉장고에서 몇 개를 더 꺼내 챙기고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며칠 전 점심 회식이 끝난 후 들른 카페에서 애플파이를 복스럽게 먹던 한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2년 전 그녀와 함께 입사한 동기였다. 지금은 각자 다른 팀에서 대리로 근무 중이었는데, 그의 성도 박 씨여서 박 대리로 불리는 바람에 서로 대답을 하다가 눈이 마주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대로 쭉 눈이 맞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니 이 여자, 한 번 차이고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그녀, 박 모양은 평소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았지만, 어쩐지 사랑 앞에서만큼은 여장부가 되곤 했다. 폭우가 오던 첫 출근 날, 무뚝뚝한 얼굴의 그가 파리하게 앉아 있는 노숙자에게 자신의 우산을 내어주는 모습을 목격한 후 짝사랑이 시작됐다. 예로부터 그녀의 이상형은 다정한 남자였다. 그는 그녀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표정이 거의 없고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남자였지만, 거리의 노숙자에게 우산을 건네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아주 부드럽게 웃기도 했다. 그럴 때 올라간 입꼬리는 그가 좋아하는 애플파이처럼 더없이 폭신폭신하고 달았다. 한 사람에게 빠지게 되는 순간은 상대의 의외성을 발견했을 때라는 사실을, 그녀는 짝사랑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리며 다시 입증했다.



그렇게 2년을 남몰래 가슴속에 품고 있었는데 석 달 전 외근이 끝난 후 이어진 둘만의 회식자리에서, 취기를 핑계 삼아 고백을 해버렸다. 그는 그녀의 고백을 듣고 미안해요. 지금은 연애할 여력이 없어요. 라며 내내 말을 아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고 아차 싶었지만, 녹록지 않던 첫 사회생활을 순정이라는 원동력으로 윤이 나게 해 준 마음을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살면서 두세 번 연애를 했으나 모두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때 자신만 상처를 받았다고 오해한 적도 있었고, 사랑만으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오만하게 군 적도 있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는 일은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는 것처럼,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종류의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이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을 앓거나 도중에 위험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이 선택에 따른 책임은 본인의 몫이라는 것.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녀는 또 서툰 글씨로 서명하고 말았다.


회사에 도착한 그녀는 탕비실에서 그를 마주치고는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왔다. 거절은 수도 없이 상상한 결과였는데도, 예상보다 쓰라렸다. 그에게 주려고 가져온 사과의 표면이 가방 속에서 반들반들하게 빛이 났다. 연애할 여력이 없다는 말은 그가 이 관계에 대해 시작하기도 전에 기권표를 든 것과 같다. 싫다는 말보다 더 확실한 거절.


그날 그녀의 사과는 결국 탕비실의 냉장고로 들어가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퇴근길,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1층에서 택시를 부르려는데 그의 차가 앞에 멈춰 섰다. 그는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뒤에서 기다리던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는 통에 얼결에 타고 말았지만, 그와 가까이 있으니 심장이 널을 뛰어 금세 후회했다.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주말 일정을 물어봤다. 조금 오랜 시간을 두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둘은 돌아오는 주 토요일 저녁에 연희동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뒤, 헤어졌다. 지난 석 달 사이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차를 보며 내 신경은 온통 당신이기 때문에 아까 말한 `편한 대화`가 불가능할 것이라 확신했다.

확실한 것은 그에게 반하던 그 순간뿐이라고. 찰나로 시작됐으나 마치 영원할 것처럼 계속된다고. 어쩌면 이번엔 당신이 내민 제안에 속절없이 서명하게 된 것 같다고.

가방 속 사과가 있던 자리에서 햇살과 비와 사람들의 손길을 받으며 자란 과일향의 기척이 느껴졌다.


사랑은 그의 앞에 사과를 수없이 갖다 주었다가도,

그가 그것을 먹고 체할까 봐 늘 마음 졸이는 것.

그녀는 자신을 어지럽히는 그 향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입가엔 미소 또한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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