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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규 Aug 23. 2024

걱정보험 주식회사

#8

  진짜 요상한 꼬맹이 고객도 있었다. 나는 이 고객을 통해 요즘 세상이 진짜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터넷에 분노의 포르노가 범람하고 야동이라는 단어를 중학생도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고 하더니 진짜 사실이었다. 

  이제 막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여자아이였다. 옆 가르마를 깊이 타고 귀 위쪽으로 머리핀을 꽂아 교묘하게 이마 여드름을 감추고 있었다. 10대답게 풍성한 앞머리를 2대 8로 나누어 옆으로 넘긴 뒤에 보라색의 하트 머리핀으로 고정해 깻잎 머리를 완성한 모습이었다. 요즘은 중학생도 화장을 하는지 살짝 뺀 아이라인 위에 흑갈색의 아이섀도로 덧칠을 했다. 볼에는 살구색 블러셔를 발라 귀여움을 더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그 여자아이를 맞이했다. 

  “그냥요.”

  “예?” 

  깻잎 머리 여자아이는 무적의 중2 태도로 무장하고 어른들을 대하는 타입이었다. 아직 세상이 어떤 곳인지 탐험하고 있는 주제에 마치 세상을 다 안다는 태도였다. 그 나이대의 순진하지만 자신이 순진하다는 사실을 절대 들키기 싫어하는 여자애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였다. 나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했다. 나도 한때는 저런 적이 있었으니까. 내 예감에 이건 남자애와 관련된 고민임에 틀림없었다. 

  “그럼 거기 앉아 계세요.” 

  나는 테이블에 사과주스를 하나 올려놓고 마치 그 여자아이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눈치 빠른 사장도 내 전략에 동조해 주었다.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사적인 통화를 하고 가끔 머리를 긁적거리고 나에게 점심에 뭐 먹을지에 대해서 토론을 시도했다. 여자아이는 주스 병에 쓰인 사과라는 단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한참 한식이냐 중식이냐를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을 때였다.  

  “저는 중1 여학생이고 고등학교 2학년 오빠가 있는데요.” 드디어 그 여자아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무심한 척했지만 여자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학교 끝나고 옷 갈아입고 학원 가려고 할 때였어요. 거실에서 속바지 벗고 반바지로 갈아입었는데요.” 

  그 여자아이는 아줌마들이나 할머니들의 대화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뜸을 들이며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여자아이와 떨어져 앉아 있었지만 여자아이의 다음 말이 궁금해 몸이 달아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오빠가 제가 옷 갈아입는 걸 계속 쳐다보는 거예요.” 

  “그, 그래서요.” 

  뭔가 막장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외국의 가족 스토리면 어떡하지 걱정되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재촉했다. 여자아이는 계속 사과주스를 만지작거리다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제가 너무 생각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왜 거실에서 옷 갈아입었지, 이런 생각이 들고.” 

  “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나는 평정심을 잃고 그 아이의 앞에 앉아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여자아이는 내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

  “걱정하지 말고 언니한테 털어놔 봐요. 우리가 괜히 걱정보험 주식회사를 운영하는 게 아니에요. 고객님을 괴롭히는 걱정거리는 오늘 전부 털어놓으셔야 해요.”

  “오빠가 저한테 무슨 끈적한 액체 같은 걸 뿌린 거예요.” 

  “네? 끈적끈적한 액체요?”

  “네. 그게 물이 아닌 거 같은 게. 그게 끈적끈적했어요. 색깔도 뿌옜고.”

  “네? 끈적끈적했다고요?”

  “네. 만약에 그거면 어떡하죠?”

  “그거라뇨?”

  “정액 뿌렸을까 봐. 만약 정액 뿌렸다면 저 임신하면 어떡해요?” 

  나는 열네 살 때 정액이란 말을 몰랐던 것 같은데. 정액이나 임신 같은 단어들이 열네 살짜리 여자애의 입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마치 라면의 면을 넣기 전에 물을 붓고 수프를 넣는 것을 설명하는 것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웃을 수도 없고 해서 사장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놈의 사장이 요건 기회다, 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그건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아이를 보내려고 하는데, 사장은 살만 빵빵하게 오른 엉덩이로 나를 옆으로 밀쳤다. 

  여자애는 말을 계속했다.  

  “제가 인터넷에서 다 찾아봤거든요. 근데 진짜 정액 뿌려도 임신 안 된다고 해도 자꾸 제 몸에 정액이 남아 있을 거 같고. 계속 남아 있다가 언젠가 임신할 거 같고. 그래서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저한테 정액 냄새난다고 놀릴 것 같고. 저도 제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고치고 싶어요. 맨날 쓸데없는 걱정만 많아서.”

  여기서 사장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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