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악필 Jan 21.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6

여섯 번째 우리 집


세상일이 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계획이 없으면 안 된다. 삶의 방향성이나 기준이 없이 하루하루 닥치는 대로 사는 것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획의 중요성에 매몰되어 자신이 다 통제할 수도 없는 삶을 고집스럽게 계획대로 하려고 해서도 곤란하다.


나의 경우 계획이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자라오면서 계획의 필요성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삶을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상 닥치는 대로의 삶과 다를 게 없어 보였고 실제 일도 차라리 계획이 뭔 소용인가 할 정도로 여러 변수와 즉흥적인 임기응변식 판단으로 삶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세부적인 계획보다는 큰 방향성만을 정하고 나머지는 닥치는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게 점점 더 익숙해져 갔다. 누군가는 아무 생각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계획이 올바른 것인지도 모르겠는 데다 도대체가 사실상의 일들은 계획과 무관하게 이뤄지다 보니, 계획을 세우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여섯 번째 우리 집인 자취집으로 이사를 할 때도 나는 새로운 삶을 그저 받아들여 보자는 생각이었고, 너무 막막하여 도무지 계획이 세워지지 않을 때는 그저 긍정의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텨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편으론 내려놓고 되는 대로 막살아 보자는 생각도 있었고 한편으론 언젠간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나올 거라는 막연한 희망도 있었다.

이삿짐은 80리터 배낭에 다 넣어도 될 만큼 작았다. 반면 같이 살 문과대의 방장형은 텔레비전을 포함 이것저것 많아 손수레를 빌려야 했다. 우리 집은 이층 건물의 이층에 위치해 있었고 그 방 하나는 둘이 살기 적당했다. 집 안의 거의 모든 비품들은 방장형 것이었고 나는 형식상 같은 지분을 갖고 사는 거였지 사실상 형 집에 얹혀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이 자취 생활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 알 수 없지만 당장에 누워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고 좋았다. 내가 하숙을 편안한 마음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아버지 신세를 지며 하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취는 그런 면에서는 약간은 죄책감을 덜게 만드는 적절한 합의점이었다. 난 좀 힘들게 살아야 맘이 편했던 모양이다.

자취 생활은 재미있었다. 일단 하숙집보다는 훨씬 더 내 집 같았고 마음이 편했다. 방장형이 사람이 좋고 마음이 넓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창문 밖은 고작 이층 집이었지만 다른 집들의 지붕을 볼 수 있어 나름 옥탑방 분위기에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저 멀리 학교도 보였고 하늘은 실컷 올려다볼 수 있었다. 난방은 연탄을 태워 방을 덥히는 연탄보일러 시스템이었는데 여름에 이사했으니 우리는 당장 사용할 일은 없었다. 한창 젊은 나이라 그랬겠지만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았다. 혹여 난방 문제로 춥더라도 등산용 침낭이 있었으니 걱정할 일은 없었다.

창문 밑에 텔레비전을 조그만 상위에 세팅하고 왼쪽에 책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에 책 등을 쌓아 놓고 뒤쪽에는 간이식 옷장을 놓았다. 나름 복도가 있어 부엌과 세면대 그리고 연탄이 있는 곳과 구분이 되었다. 오래된 집이기 때문에 단열이 충분한 것 같진 않았고 그저 판잣집 보다 좀 더 튼튼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겨울은 웃풍이 있었고 바람 불면 창문이 덜덜 거리며 시끄럽게 했다.

화장실은 아래층에 있었고 나름 깨끗한 하이브리드식(?) 수세식이었다. 오르내리기를 자주 했고 젊고 혈기 왕성하다 보니 쿵쾅거리는 소리에 주인집 아주머니한테 자주 컴플레인을 들어야 했다. 실제로 내가 복도를 걷는 소리가 컸는데 그건 방장형이 지적해 줘서야 알았다. 산에서 걷는 식으로 조심성 없이 걷다 보니 뒤꿈치가 바닥을 치는 소리가 컸던 모양이다.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90년대의 그 시절 가난한 대학생이 묵기에는 그만이었다. 앞날을 알 수는 없지만 당장에 묵을 곳이 있는 나는 그저 좋기만 했다.


그게 나름 우수한 성적(?)으로 1학기를 마친 뒤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고, 산악부에서 그 무더웠던 하계 설악산 산행을 끝낸 뒤였으니, 2학기의 생활은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2학기에는 뜻밖의 새로운 변화들이 있었다. 우선, 산악부에서 1학년 유치에 실패한 복학생 주장형은 나를 주장으로 앉히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나름 세대차(?)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혹은 시대흐름에 따르고자 하는 노력으로, 아직은 2학년이고 고작 산악부 생활을 1년밖에 안 한 나를 주장으로 앉힌 것이다. 이건 예상과는 좀 다른 흐름이었다. 이제 거주지의 안정성을 만들어 놓자마자 새로운 불안함 속으로 가는 느낌이었달까.

더불어 설상가상으로 나에게 당시 산악회(재학생+졸업생)에서 추진하던 초모랑마(에베레스트) 등반을 같이 하자는 제안이 들어와 나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하계 설악산에서 만난 졸업생 형이 지나가듯 제안한 히말라야 등반 얘기가, 처음엔 웃고 넘겼던 그 얘기가 실질적으로 계속 압박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한 학기 내내 거절했던 거 같다.


한편 좋은 일도 있었으니,  지난 학기의 우수한 성적(나를 기준으로)을 받은 나에게 장학금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성적이 안 좋기로 유명한 나였기에, 아마도 놀라서 준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막은 아마도, 당시 과 내에서 친구들은 대부분 강남이나 서울 근교 출신이 많았는데, 나처럼 시골 출신의 가난한 학생이 드물어 우선 대상이 된 듯했다.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성적이라 그동안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성적이 정상화되어 주는 건지 우연히 그때 장학금 제도가 생긴 건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남은 학기 보통이상 수준의 학점만 유지하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산악부 주장이라 자신 없다며 거절하는 황당한 발언도 했지만 결국 교수님의 설득을 듣고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 장학금은 등록금 전액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남은 학기 등록금이 해결되는 아주 획기적이자 내 사정에는 천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드디어 아버지에게 면을 세울 수 있게 된 셈. 난 내가 알아서 하는데 한발 더 다가선 것이다.


이런 급격한 그리고 복잡한 변화 속에 나의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인생은 역시 예측할 수도 계획대로 되지도 않는다. 나는 학기가 개설되자마자 신입생 유치를 위해 부지런히 준비를 했다. 신입생은 물론 동기도 없는 상황이 되어 학기 첫 정기 집회를 할 때는 후배는 하나도 없이 막내인 내가 주장자리를 차지하고 복학생 형들과 회의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었다.

또한 주장이라는 자리의 어려움을 실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보다 한참 높은 학번의 선배들에게 전화를 해서 행사 참여를 독려해야 했고 경험 없는 주장에 이런저런 충고와 간섭이 넘쳐나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온갖 고민과 스트레스 속에 복학생용 빨간 소파에 앉아 줄담배를 씹어 피던 시절이다.

당시 방위에 복무하던, 나의 수강신청을 도왔던 친구와 고민을 토로하며,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산이 도대체 나의 미래에 무슨 역할을 하게 된다고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하소연을 했더랬다. 산은 좋은데, 그와 관련된 제반 행정이나 조직관리 등은 너무도 젊고 어린 나에겐 스트레스였다.

어쨌든 신입생이 들어왔고 나는 꾸역꾸역 어설프지만 산악부를 이끌어 갔다.


2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장학금 기준 학점에 모자랐다. 신입생은 2명을 남겼고 에베레스트는 가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뭐가 뭔지 모르게 한 학기가 끝났고 나는 에베레스트 원정 준비에 점점 더 가담을 해갔다.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학점은 부족했지만 다음 학기 장학금은 나왔다. 여전히 주장할 깜은 안 되었지만 주장을 해야 했고 여전히 히말라야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지만 나는 원정대에 가담이 되어 있었다.

나의 산행 능력은 일취월장을 해 자심감은 하늘을 찔렀으나, 사람을 대하거나 조직을 관리하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해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는 계속되었다.

그래도 3학년 1학기에 들어서면서 또다시 신입생 유치를 위해 노력해야 했고 원정준비는 더욱 바빠졌다. 원정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장학금은 포기한 거나 다름없었고, 당장의 학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실제 그 학기의 수업은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한편 그 와중에 나의 여섯 번째 우리 집에서의 추억은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우리 집은 학교와 가까운 시장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종종 사랑방 역할을 했다. 방장형 친구 선배들이 자주 술을 들고 찾아왔고 나는 덩달아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며 술을 얻어먹었다. 당연히 나도 내 산악부 후배들, 군대 갔다 휴가 나온 동기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집은 술집이자 여관이 되기도 했고 종종 노래방도 되었으며 여자친구 없는 남자들의 하소연 장소가 되기도 했다.


나의 방장형하고의 관계는 일관되었다. 나는 계획성 없고 조심성 없고 털털했으며, 그 형이 보기에도 우악스럽고 괴팍하며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다. 반면 그 형은 내겐 어른스러웠고 모든 것을 관장하는 완성된 사람이었고 모르는 게 없었으며 호탕하고 너그러웠고 미래가 촉망받는 사랑이었다.

그러니 나는 맨날 혼나는 사람, 답답하고 지저분한 동생, 한심하고 철없는 인간 역할을 전담했다. 청소도 식사준비도 연탄 갈기도 그 형이 일일이 지시해야 하는 참으로 무대책 인간형이었다.

그래도 그 형은 정이 많아 나를 항상 아껴주었고 좋은 말도 해주었고 친동생 이상으로 나를 챙겨 줬다.


그 형이 유일하게 부족한 점은 여자 친구가 없다는 거였다.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내게는 그다지 문제 될 것도 아닌 거 같았는데, 복학생이었던 그 형은 뭐가 그리 급했던지 나한테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몇 번을 무시했는데 이번엔 진짜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을 해소하고자 과 누나랑 소개를 시켜줬다. 두 사람한테 시간을 잘못 알려줘 더 많은 목 조름을 당했지만 말이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의 소개팅에 대한 보답을 해주겠다며, 안 한다는 거 굳이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하는 통에, 목 조름을 피하고자 마지못해 소개팅을 했다. 그래서 나는 에베레스트 등반 준비 중에 여자 친구가 생겨버렸다.

결국엔, 남자로서 파트너가 되기 이전에 무지무지 가난했던 대학생이었다는 점, 원정 준비로 너무 혼이 빠져 있었다는 점, 그녀의 전 남자 친구의 집요한(?) 부탁 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그 후 히말라야에 갔다 오면서 이런저런 사유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좀 더 자유스럽고 편한 우리 집이 생겼음에도 내 주변에 생기는 이런저런 일들로 그다지 만끽하지 못한 느낌이 든다. 히말라야 등반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그것을 위한 운동과 준비 등으로 바쁜 일상은 이미 편안한 우리 집을 떠나 나의 마음을 저 멀리 산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원정준비 막바지 바쁜 준비기간에는 방장형을 만나 같이 대화하기도 힘들었던 것 같다. 일정 기간 합숙을 하며 집을 떠나 있기도 했고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경우도 많아서일 것이다.


믿을 수가 없는 얘기지만, 나는 정말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비행기를 탔고 우리 집을 떠나 세계 최고봉을 향하게 되었다. 이게 과연 내가 선택한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이었지만, 나는 모처럼 얻게 된 나의 안식처를 방장형에게 맡기고 여섯 번째 우리 집을 떠나게 된 것이다. (악필, 2023.1.21)



                    

작가의 이전글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