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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서 색연필을 들었다

아플 수도 있고, 게을러질 수도 있지

by 윤채

갑자기 장염이라니. 날벼락도 아니고.



51562drsdl.jpg Vrouw Hogerhuis, zittend in bed (eerste ontwerp) (1899)_Richard Nicolaüs Roland Holst



몸이 망가질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며칠 동안 속이 뒤집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0년 전쯤, 장염을 달고 살던 때가 떠올랐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병원을 드나들고, 죽과 약으로 연명하던 시절.



다행히 그 시기가 지나고 한동안은 건강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장염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무너뜨렸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평소 같으면 아파도 루틴을 지키며 할 일을 해냈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난 후, 산더미처럼 쌓인 할 일을 마주했을 때,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과, ‘도대체 언제 다 하지?’ 하는 부담이 뒤섞였다.



51566drsdl.jpg Vrouw van Richard Roland Holst in bed met afgewend gezicht (1903)_Richard Nicolaüs Roland Holst



불안했다. 조급했다.



해야 할 일은 쌓여 있는데, 몸과 마음은 여전히 게으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건 새로 산 색연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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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링북을 펼치고 색연필을 손에 쥐었다. 손끝에 힘을 주어 색을 채워 넣는 동안, 머릿속이 점점 정리되기 시작했다.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을 번갈아 가며 칠하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순간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B612_20250116_084300_614.jpg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그래, 아플 수도 있고, 게을러질 수도 있지. 중요한 건 그 상태에서 완전히 멈추지 않는 것 아닐까?



넘어졌다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색연필을 내려놓고 다시 글을 쓰고 있다. 아직 모든 걸 회복한 건 아니지만, 이제 첫걸음을 내디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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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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