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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착각의 정체

by 윤채
"도대체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얼핏 보면 단순한 고민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른다'라기보다 '너무 많이 알고 있다'라는 고백에 가까운 것 같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을수록 글은 멈춘다

생각이 많을수록 글은 멈춘다. 글을 쓰기 전에 우리는 습관처럼 검열부터 한다.



"이 이야기가 쓸 만할까?"

"이건 너무 평범하지 않을까?"

"이걸 누가 읽어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글감은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채 심사대 위에 올라간다.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 주제가 경쟁하지만, 어느 것도 선택되지 못한다. 결국 글이 아니라 고민만 남는다.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 쓰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아이디어가 너무 많아서 손이 멈추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생각이 많지 않아서가 아니라, 생각을 흘려보내는 법을 알고 있어서 쓸 수 있는 건 아닐까.



글은 쓰면서 방향을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완벽한 주제를 먼저 세워두고 그 틀에 맞는 문장을 찾으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글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생각이 정리돼야 글을 쓸 수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글을 써야 생각이 정리된다.



글을 쓰면서 "아, 내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를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예전에는 '의미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멈췄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주제만 고민하다 결국 한 줄도 못 쓴 적도 있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고 '의미 있는 글'을 쓰려하지 않고, 그냥 '지금의 나'를 쓰면서 차차 글의 방향을 찾았다.



그렇게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문장으로 시작했는데, 그 한 줄이 생각을 움직였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언제부터였지?" 같은 질문이 이어졌고, 그 질문이 문단을 만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글은 애초에 계획했던 주제보다 훨씬 진솔했다.



AI는 주제를 주지만, 당신의 온도는 주지 못한다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문제는 더욱 뚜렷해진 것 같다. AI는 '무엇을 쓸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명령어에 따라 문장을 만들어낼 뿐이다.



AI에게 "글 주제 추천해 줘"라고 하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 10가지" 같은 답을 즉시 내놓는다. 하지만 거기엔 온도가 없다. AI는 주제를 줄 수 있지만, 그 주제에 담긴 감정의 무게를 대신 느낄 수는 없다.



글감은 외부에서 올 때도 있지만, 내 안에서 길어 올리는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때론 글은 논리보다 체온에 가깝다. 오늘 하루 동안 마음에 걸린 말, 잊히지 않는 장면, 이유 없이 불편했던 순간이 바로 글감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주제'를 찾으려 애쓰는 것도 좋지만, 지칠 수 있다. 우리에겐 '나를 건드린 순간'을 붙잡는 게 더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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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문장에서 시작해도 괜찮다

생각이 막힐 때는 단순하게 시작해 보면 어떨까.



"지금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이 문장을 그대로 써보는 것이다. 이어서 "그래서 그냥 이걸 쓰고 있다.", "오늘은 괜히 피곤하다."라고 적어도 괜찮다.



소소한 문장들은 다음 생각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준다. 처음 쓴 문장은 나중에 지워도 된다. 중요한 건, 그 문장이 당신을 다음 문장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이다.



글감은 거창한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오늘 커피가 유난히 썼다."

"출근길에 들은 노래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같은 사소한 문장이 시작점이 된다. 관찰이 많을수록 글은 깊어진다.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문장을 붙잡아두면, 그 안에서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 같다.



지금 떠오르는 감정을 기록하는 것

'뇌를 비우는 글쓰기'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 좋은 문장을 떠올리려 하기보다, 지금 떠오르는 감정을 기록하는 것이다.



"오늘은 왠지 마음이 답답하다."

"누군가의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같은 문장은 평범해 보여도 살아 있는 문장이다. 생각이 완성된 뒤에 쓰는 게 아니라, 쓰는 동안 생각이 완성된다.



AI가 아무리 많은 주제를 제시해도, 오늘 당신이 느낀 감정의 결을 대신 쓸 수는 없다. 결국 글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쓰는 사람에게서 태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시작해 보면 좋겠다.



"지금 나는..."



그다음 문장은 우리의 손끝에서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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