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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후 Sep 28. 2024

너에게 나이 듦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행복을 향해 쓰는 편지

J에게



J야 너에게 나이 듦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노화'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생물학적인 나이 듦 말고, 사람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넌 언제 나이가 들었음을 느끼고, 또 늙었다고 느끼는지 궁금하다. 주어진 인생에 절반도 못 채운 우리가 고민할 이야기인가 싶지만, 한번 떠오른 궁금증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한 살, 두 살, 서른 살 하는 나이들은 숫자에 불과한 것 아닌가?



사실 오늘 아침 달리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약국이 문을 닫았다며 근처 약국을 물어보는 할머니가 계셨거든. 갑자기 소리를 꽥 지르시길래 정말 깜짝 놀랐는데.. 근처 문 연 약국이 있나 물어보시더라. 일요일 오전 8시 50분쯤이었으니까, 네이버 지도로 한참을 찾아도 문 연 약국이 보이질 않더라. 한참을 뛰었으니 땀에 흠뻑 젖었는데, 한참을 약국을 찾고 있으니까 더운데 고생한다고, 등을 막 팍 팍 두드리시더니 마저 뛰어가라고 하시더라. 사실 내가 뛰러 나왔으니 큰 고생한 건 아닌데, 더운데 나와서 고생한다고 하시니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온 것 같기도 하고, 고맙다고 하시니 또 문 연 약국을 찾아드린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내가 근처 약국을 확인하러 잠깐 뛰어갔다 온 사이에 할머니는 금세 어떤 아주머니를 붙잡고는 묻고 계시더라. 아주머니는 또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고. 일요일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을  좀처럼 찾기 쉽겠냐고 말이지. 나도, 아주머니도 할머니의 약국 찾기 여정에 안타까워하면서 헤어졌어. 약국은 몸이 아플 때 찾는 건데 말이지 하면서. 할머니가 비록 날 부를 땐 꽥! 하고 소리 지르셨지만, 또 내가 마땅한 약국을 찾아 드리지도 못했지만, 대화가 끝나고 다시 뛰어서 집으로 갈 땐 기분이 정말 좋더라. 내 등을 막 팍 팍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얘기하는 게 우리 할머니 같기도 했고, 즐거운 대화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이런 기분 좋은 대화를 하는 어른이 되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아무도 묻지 않은 내가 생각하는 나이 듦이란, 3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사람이라면 누구나 숙제처럼 해야 하는 일들을 해 나아가는 것도 나이 듦이라고 생각한다. 걸음마도 때야 하고, 한글도 때야 하고, 학교도 가봐야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어보고, 내가 좋아하는 일도 좀 해 보고, 정도 붙여 보고, 정도 떼 보고, 사랑도 해보고, 행복도 해보고, 건강도 해보고, 결혼도 해보고, 나랑 똑 닮은 아기도 낳아보고, 효도도 해보고.. 이 편지를 가득 채울 수도 있겠지만 이만 줄여야겠다. 이런 퀘스트들을 하나씩 깨면서 사람은 나이 들어간다고 생각해. 순서나 속도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넌 어떤 숙제를 해치우는 중인지 궁금하다. 



두 번째, 스스로 생각할 줄 알게 되는 것이 나이 듦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숙제들을 하나씩 해치우다 보면 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해봐야 그렇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세한 방법은 나도 잘 모르지만, 나도 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나이 듦이라고 생각해. 단순히 내 생각만 많아져서 고집이 세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누가 물어보면 내 생각을 정리해서 말할 수 있고, 누가 그의 생각을 말하면 또 잘 정리해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나이 듦이라고 생각해. 언젠가 우리도 어른이 된다면, 내 딸이나, 귀여운 조카나, 놀이터의 초등학생들, 하물며 주말 아침 약국을 찾다가 만난 젊은 청년과 내 생각 하나 없이 대화를 하게 된다는 건, 너무 두려운 일 아닌가? 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세 번째, 숙제도 잘 해내고, 스스로 생각도 잘 하게 되어서, 완연한 내가 되어가는 것이 나이 듦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완연한 가을, 완연한 봄이라고 말만 했지, 정확한 완연함의 뜻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주 뚜렷함'이라고 해. 나도 이제 알았네. 이따금 주변의 어른들을 보면, 뭔가 희미한 사람들이 있더라. 사람의 테두리가 어떻게 희미할 수 있겠냐마는, 그와의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는 지도 잘 모르겠고, 방향은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번의 대화와 이번의 대화가 늘 다른, 그런 어른들이 있더라. 스스로 오래 생각해 보고, 또 주변 사람들과 오래 대화를 나누어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되는 것, 그렇게 완연한 내가 되는 것이 나이 듦이라고 생각해. 넌 너에 대해 얼만큼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얼마나 완연한 네가 되었는지 말이야.



계절로 따지면 이제 막 초여름을 살고 있는 우리인데

삶에 대해 이토록 고민하는 게 건강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난 일단 해보는 중이야.

너무 깊은 고민은 편지에 다 남겨두고

이것저것 해보는 중이야.



지금의 실패는

나중의 경험이 되어주겠지.




여름의 실수는

가을비가 다 씻어주겠지.




한번 떠오른 궁금증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자꾸 질문해서 미안.


T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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