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재이해
아래는 김환기의 말입니다.
"미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기 전에 아름다운 것을 알아내야 한다.
아름다운 것에 무감각한 미술가가 있을까.
미술가는 눈으로 산다. 우리들은 눈을 가졌으되, 만물을 정확히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바라보는 사물의 모습이 그 사물의 정확한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조금 놀랍습니다.
두 눈으로 담아낸 사물이 진짜 모습이 아니라면, 무엇이 진짜인가요?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 보다.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꽃이란 단어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꽃은 존재했음을 떠올려 봅니다.
꽃이라는 이름 속에 그 의미가 갇히기 이전부터 꽃은 그 자체로 존재했습니다.
미술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화가 김환기입니다.
아래는 장 폴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물체들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만질 수 없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고, 사용한 후에는 제자리에 두고, 그것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유용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다르다.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데, 이게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
난 마치 살아 있는 짐승들과 접촉하듯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좀 쉽게 말하면, 내가 앉아 있는 의자가 사실은 내 엉덩이를 만지고 있다는 중인 건가요?
"나는 좌석을 짚다가 황급히 손을 뗀다. 이게 존재한다.
그 위에 내가 앉아 있는 이것, 손으로 짚었던 이것은 '좌석'이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그 위에 앉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려는 생각으로 일부러 이것을 제작했다.
그들은 가죽과 용수철과 천을 가지고 작업에 착수했고,
작업이 끝났을 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이것은 좌석이야'라고 조금은 퇴마의식을 행하듯 중얼거린다.
하지만 이 말은 입술에 머무를 뿐, 이것 위에 내려앉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이것일 뿐이다."
화가 김환기의 말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그들의 특권인 '의식'과 '언어' 그리고 '이성'을 이용해 존재들을 규정했습니다.
언어 속에 만물의 존재를 가두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아래는 필자의 생각입니다.
김환기도, 사르트르도, 수많은 위대한 예술가와 철학자, 수학자와 과학자들은 존재에 대한 끝없는 의구심을 갖고, 탐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잘 이름 붙여져 수 천년을 불러온 사물의 이름까지에도 의구심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같은 현상을 보고 과학적 사실을 정리해 냈고, 전 인류가 겪었던 전쟁 속에서 위대한 문학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도 스스로에게 끝없는 의구심을 품고,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이 건강한지,
내가 가고 있는 길의 방향이 옳은지,
내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이렇게 살다가 마주하게 될 먼 미래의 나는
내가 바라던 모습이었는지,
따위의 질문을요.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다 보면
종종 정적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보통 각자 소주 한 병씩은 먹은 다음에, 즐거운 얘기를 한참 하다가
갑자기 뚝. 하고 말이죠.
그럴 때마다 전 조금은 진지한 얘기를 꺼내는 걸 즐깁니다.
2시간은 깔깔대며 웃었으니 진지한 얘기 한다고 타박 주는 친구도 없고 좋습니다.
작년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한 가지 고르라면 뭐야?"였습니다.
이 질문을 들으면 다들
전에 없던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의 한 가지 키워드를 말해주고, 또 옆에 앉은 친구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이 친구의 키워드는 왜 이것일지, 저 친구의 키워드는 왜 저것일지 고민도 해봅니다.
그러다 마지막엔 서로 힘 내보자고, 응원한다며 짠 한번 하고 소주를 털어 넣고는,
다시 시덥잖은 즐거운 얘기를 하다가 집에 가는 겁니다.
제 나름
제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해서 했던 질문인데,
다들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또 어떤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것인지,
또 친구들에겐 어떤 질문을 하게 될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환기와 사르트르는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