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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림 Sep 02. 2023

제목은 ‘여행’

:남편의 시점


 아내는 오늘도 식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흘깃흘깃 나를 쳐다보는 것이 심상치 않다. 무슨 꿍꿍이 일까? 나를 소재로 글을 쓰려나? 독특한 사람. 이름이 ‘주연’이라서?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원 주 연. 아내는 내 삶의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외친다. 내가 보기에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모두의 삶 속에서도 ‘주연’으로 남길 원하는 것 같다.


얼마 전에도 불현듯 자기를 찾겠다며 집을 나섰다. 제주도에서 며칠 쉬고 오겠단다. 아내를 신뢰하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지만 몸이 약한 아내 혼자 보내는 것이 내심 걸린다. 말려서 될 것도 아니고 말린 후 후폭풍은 감당하기 더 어렵다.


아내는 오색빛깔 무지개떡 같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다. 도전과 모험을 좋아하는 아내를 보면 신기하기도, 불안하기도, 약이 오르기도 하다. 나랑은 너무나도 다른 여자. 그게 매력이고 그래서 또한 버겁다. 난 음악, 미술 등에 소질이 없다. 다양한 예술분야를 넘나드는 아내가 멋있어 보이다가도 감성 부스러기들을 긁어모으며 무언가 쥐어짜 내려 할 때면 왜 저러고 사나 싶다.


난 1년 9개월 후면 정년퇴직을 한다. 아내와 단 둘이 보내야 할 시간들이 많아진다. 걱정도 되고 설렘도 있다. 함께 외출을 할 때 즐거워하는 아내의 표정을 보면 노후에 심심하지는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증세가 악화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다. 심장판막에 기계를 넣는 큰 수술을 두 번 받고 매일 약을 복용하는 아내는 이따금씩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는다.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적도 여러 번 있다. 나의 회사는 안성에 있다. 고속도로를 내달리며 서울 집으로 향할 때면 별의별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부디 딸들 결혼할 때까지 만이라도 건강해주길, 노후는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언제쯤이면 난 이 책임이라는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회사일도, 아버지 노릇도, 자식 역할도, 거기다가 아내의 보호자까지, 과연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있을까? ... 하루하루 태산을 등에 지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내 모습이 처량하다가도 ‘조금 만 조금만 더 기운 내자. 나도 곧 쉴 수 있을 거야. 나도 아내처럼 취미활동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탐색도 해보고 훌쩍 떠날 수도 있을 거야’ 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혼자만 즐기기 미안했는지 아내는 한 달에 한 번씩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내겐 꿀 같은 주말인데 차 막히고 사람도 많은 곳에 왜 가야 하나 싶었다. 장소와 숙소를 정해놓고 아내는 조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해외출장이 많은 나는 국내여행은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록달록 묘한 재미가 있다. 골목길을 찾아다니고 유적지를 탐방하고 감성숙소에서 묵고 안 먹어본 향토음식을 먹는 소소함 또한 즐거웠다. 밖에서는 리더로, 집에서는 가장으로 지시와 선택만 하다가 아내가 정해놓은 데로 따라다니니 부담이 덜했다. 이제는 내가 검색해서 여기도 가보자고 한다.


두 달 전 충남 서산에 다녀왔다. 도착해서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던 ‘서산댁’이었다.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남편을 피해 남의집살이를 하며 자식 공부 시키고 부모, 형제 생활비를 대는 억척같은 여인. 갯마을 출신 ‘서산댁’ 은 우리의 어머니상이기도 했다. 그 여자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지만 여자의 일생은 저런 거구나 싶기도 했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대답대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 새초롬한 눈빛은 오묘했다. 시대의 저항이고 내게 ‘꿈깨라’ 하는 냉소가 가득한 눈초리였다. 나는 황급히 다른 주제로 옮겼다.


 세상은 바뀌었고 나는 적응해나가야 한다. 권위를 내세우고 통제하려고 들면 가족으로부터 왕따가 된다. 지금껏 고생한 대가와 보상으로는 잘 자라준 딸들과 아직 생존해 계시는 부모님, 알록달록 아내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지낼 수밖에, 이것이 나의 숙명처럼 말이다.


 아내는 계속해서 흘깃흘깃 나를 쳐다보며 자판을 두드린다. 무엇을 쓰는지 모르긴 몰라도 제목을 붙인다면 ‘여행’이라고 했으면 좋겠다. ‘여행’ 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따로 또 같이.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여행도, 혼자만의 긴 여행도 많이 가지면 좋겠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그럴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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