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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우주 Oct 21. 2024

마음은 프로그래밍된 자동화시스템이다.

생각들은 자동화시스템의 산물일 뿐이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드넓고 무한한 셀 수 없는 세계들 중에서 지구의 삶 속, 지금의 배역인 인생 경험을 선택했다. 이 육체 속의 경험은 무한한 근원의 본래의 나와는 반대적인 것들의 체험이다. 빛의 영에서 물질적인 몸이 되어보는 체험은 활동과 결합으로 이뤄진 신성의식이 제한과 한계를 넘어선 그 이상을 창조하기 위함이다.



|마음프로그램이란

 기본적으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흔히 에고라 불리는 자아가  필요했다. 몸이 나라고 한정 짓는 마음말이다. 이는 곧 몸의 의식이다. 감각과 지각, 자각, 경험 등이 합쳐진 나라는 자아, 여기선 이를 작은 마음이라 칭하려 한다. 이 작은 마음은 무한한 근원 속에서 탄생하였으며 전체 안에서 개별화된 '영'이 육체를 장착함에 동시에 이 작은 마음을 통해 '혼'이 되어 "영+혼"이 되었다.

작은 마음에는 몸이 나라는 자아 프로그램이 생존을 위해 탑재되어 있다. 그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분별, 평가, 판단, 비교, 분리한다. 이는 나의 몸을 모든 위험에서부터 지키기 위해서이다.

삶의 기본적인 필수 3요소인 음식, 옷, 집 이 세 가지 의식주는 영이 아닌 에고의 욕망이다. 이 생존본능으로 인해 지속적인 삶이 가능케 되고 욕망에 따른 다양한 시도를 통한 세상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로 지구인에게 설계된 마음프로그램은 '육체적인 나'로 한정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이 몸의 의식은 생존을 위해 이 인생체험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에 물질세계를 위해 그렇게 탄생하였다.

평온한 자궁에서 나온 세상과의 만남은 참으로 낯설고 기괴했다. 차가운 공기가 매섭게 나를 감싸는 두려움과 분리되었다는 이질적인 외로움이라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감정상태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이 신기하고 재미나기까지 했다. 그저 이 감정체들을 느끼면 될 뿐이었다. 영유아시절엔 언제나 잠을 통해 자신의 존재로 머물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깨어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감에 완전히 기댈 수밖에 없었고 영의 의식은 희미해져 기억이 완전히 의식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행동범위가 넓어지고 나를 둘러싼 대부분의 사람들과 집단적인 에고는 나에게 장애물들을 만드는 믿음, 획일화된 표준화를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 기준 선에 미치지 못하면 비난을, 그 선을 넘어서면 배척했다. 몸이 커갈수록 물질세계가 전부라 여기가 되었고 할당된 역할의 책임감이 강하게 어깨를 짓누르며 작은 마음의 소리가 나를 지배하며 축소시켰다. 곧 나는 몸이 되었고 작은 마음이 자동적으로 내뱉는 생각들 그리고 그 생각들을 믿음으로써 생겨난 감정 또한 내가 하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로 나는 나의 색을 잃어버리고 집단사회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망시스템에 의해 영에 대한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게 바로 몸의 의식에서 지배력이 커진 에고가 원하는 것이었다. 오직 자신(몸)을 보호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인 생존본능에 의해 진짜 나라는 의식의 파편은 저 멀리 수면아래로 잠겨 버렸다



|여러 개로 나눠진 의식파편

 하나로 통합된 의식이 아닌 여러 개로 나눠진 의식파편들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흔히들 내 안에 악마와 천사가 공존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의식의 파편의 소리를 듣는 중심엔 이 둘이 합쳐진 내가 있다. 악마가 가엾어 안아주고 천사를 신뢰하는 여기에 있는 '나' 말이다.

작은 마음(좌측두뇌), 확장된 나(심장), 영(우측두뇌)이라는 세 가지 의식에서 우리는 심장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작은 마음이 꾸며내는 것을(사실이 아닌 것들) 그저 귀엽게 바라봐주며 지켜보는 자로써 영의 느낌으로 고요히 머물면 된다.

확장된 나로 머물기 위한 구별법은 이것이다. 작은 마음은 오직 자신만이 진짜이며 나머진 의식파편들을 인정하지 않고 없애려고만 할 것이며 그 반대인 영적으로만 머물게 된다면 현실감각을 잃고 내가 하려던 인생체험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오직 중심에 선 나만이, 빛과 어둠이 합쳐진 새로운 내가 이 두 가지를 융합하여 완전한 지구삶의 체험을 가능케 해 줄 것이다. 불완전함 속에서 완벽한 완전함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두 발로 땅을 딛고 한 발자국 처음 내디뎠을 때, 작지만 찰진 응축된 기쁨을 맞이하는 것처럼.


나의 실체는 무한한 마음이오, 전체의 근원 속의 영이지만 여기에 의식하여 깨어있는 나는, 나와 나 아닌 것들의 체험을 위해 '새롭게 확장된 나'이다. '새로운 나'는 중립에서 감정드라마 속 세상에 진짜 나를 표현하고 되고자 하는 나를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빛인 영으로만 있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인간적인 삶과 그로 얻게 되는 인간적인 사랑(제한과 무한, 두려움과 사랑이 뒤섞인 팽창된 아름다운 사랑)을 통해서 사무치는 가슴아린 슬픔도 사랑의 연장임을, 그리고 이를 품었기에 느낄 수 있는 환희의 눈물 섞인 기쁨을 느끼며 매 순간 새로운 내가 되어가는 것이다.


심장에 중신에 선 내가

무한한 마음으로 존재하고

무한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여기에서 무엇을 느끼려 왔는지

무엇을 넘어선 내가 되려고 했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생각은 자동화시스템의 산물일 뿐이다

나 아닌 것들로 창조된 마음프로그램은 제한적이유한적이다. 무한한 마음속에 물질세계의 체험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작은 마음의 기본 베이스는 나약한 인간체를 위한 생존본능을 위한 것이기에 육체 속에 갇힌 한정된 시야를 가졌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배척해서도 미워해서도 안된다. 이 또한 나의 근원에서 창조된 것임에, 이는 반드시 존재해야 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한계적인 작은 마음을 통해 한 인생 체험은 내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를 찾으며 새로운 나로 확장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로 우리는 한계와 무한의 합쳐진 새로운 결과물로 재탄생되었다. 수용만 있어서 얻게 될 수 없는 것을 육체적 자아의 배척과 함께함에 탄생할 수 있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확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이원성을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

작은 마음이 생성해 내는 무의식적인 생각들은 하늘에 뜬 구름과도 같은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다. 또한 이는 사실이 아닌 에고의 믿음 필터로 걸러진 잘못된 정보이며 상상하여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기에 내 안에 악마가 있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남을 비난하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나를 비난할 필요도 없다. 사랑과는 반대적인 것들을 체험하러 온 것이기에 그러한 생각들이 떠올라도 괜찮다. 그저 그 생각들이 내가 아님을 알고, 마음이 지어내는 거짓임을 알고 진짜 나의 상태(텅 빈 마음)로 존재하며 되고자 하는 나로 세상을 살아가면 그뿐이다.

무한한마음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판단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평가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어떠한 꾸밈의 생각의 덧붙임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무한한 마음으로 존재할 작은 마음(에고)에 연민을 가지며 사랑하게 것이다.

 


|마음프로그래밍의 역할 (즉 에고가 하는 일)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비교 평가 분석하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덧붙여 생각체를 나의 머릿속에 떠 올려 보낸다. 여태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이 내가 한다고 착각했지만 비교 평가의 따른 제약적인 생각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닌 그저 프로그래밍된 자동화된 시스템일 뿐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생각들을 어찌 내가 한다고 할 수 있을 까. 하지만 우리들은 이를 알지 못해 나를 몸으로 여기고 그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또한 내가 하는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거의 대부분을 그 생각의 낚시고리에 걸렸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끝도 없이 마음이 전개하실제 하지 않는 이야기로 끌려가버린다. 과거로 혹은 미래로 아니면 나를 혹은 남들을 비교평가하는 곳으로, 비난하는 곳으로. 결국 이 생각들을 믿음으로써 생겨난 부정적인 감정들로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초조, 후회와 자괴감으로 고통받는 것이다.


쉼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구름처럼 그저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 나도 모르게 생각에 잡혀 끌려가고 있다면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생각의 이야기들은 힘이 없고 망상일 뿐이다. '저 사람이 나를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네. 분명 나를 싫어하는 게 맞아', 그 사람 그저 눈이 안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쳐다봤을 뿐이다. '어떻게 내 생일을 까먹을 수가 있지? 내가 저 사람에겐 아무 의미도 없구나(덧붙인 생각). ' 그 사람은 그저 삶에 치여 아무 의도 없이 잊은 것뿐이다. 당신을 한없이 사랑함에도 말이다. '분명 나랑 눈이 마주쳤는 데 인사도 없이 가버리네. 나를 무시하네' 시력이 좋지 않아 알아보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렇듯 작은 마음은 내가 가진 제약된 믿음들로 만들어진 필터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상상하고 지어낸다. 부정적인 쪽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걸 내가 한다 오해한다. 그저 생각체이라는 독립된 에너지로 지켜보라. 그 상상의 이야기들을 믿게 되면 에고는 신이 나서 더욱 마음껏 나의 의식을 실제 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간다. 이런 식으로 우린 늘 작은 마음의 자동화 프로그램에 의해 끌려다니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완전하게 작은 마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체험을 하러 온 것이기에 거기엔 에고가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주객전도를 바로 잡을 수는 있다. 무한한 사랑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하여 작은 마음이 나를 지켜주고자 함을 이해하고 이 또한 수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처음엔 많이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심장에 중심에 선 나를 인지하고 영으로써 느낌을 신뢰하며 작은 마음의 창을 품는 것을 노력하라. 한 발짝 나와 인생을 영화로 바라보라. 그러한 시도가 거듭될수록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부처님 조차도 그러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다시 무한한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명상하기를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




마음을 지켜보는 자, 이를 바라보는 자가 진짜 나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확장된 새로운 나로 깨어난 것이다. 서로 이끌린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의 폭발로 그 둘이 합쳐진 아이가 탄생하듯 우리들도 나와 아 아닌 것을 통해 이 지구에서 새로운 나로 탄생한 것이다. 사랑과 두려움의 사이에서 수용과 배척 사이에서 나는 사랑만으로 존재하던 내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나로 이 경험들을 통해 확장되어 성장하였다. 더 큰 수용으로 무한한 확장의 과정 속에서 우리들은 끊임없이 변화와 진화를 반복하며 영원한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빛만이 존재한다면 빛은 빛인 줄 알 수 없으며 빛의 진짜 속성을 알 수 없기에 나를 알기 위해 어둠으로 들어와 어둠을 경험하기를 택하였다. 이로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빛을 되찾았고 더불어 어둠과 빛이 함께 있어야만 창조할 수 있는 다양하고 새로운 그림자들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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