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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Sep 24. 2023

<헤어질 결심>의 붕괴

사랑이라는 무너짐



<헤어질 결심>을 보고 곧바로 떠오른 건 김승옥의 “무진기행”이었다. '무진기행'은 1967년 <안개>라는 영화로도 개봉되었는데 '안개'는 <헤어질 결심>의 주제가인 동시에 키워드이기도 했다.



탕웨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박해일의 심장은 고동쳤다.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흔들림, 충격은 계속 여진(餘震)이 되어 그의 삶을 망가뜨렸다. 하지만 그는 그 현상을 ‘사랑’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한 여인의 남편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피의자’에 대한 애정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조차 속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너무 멀리 가 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붕괴되었다고 여긴다. 붕괴(崩壞)의 사전적 의미는 허물어져 무너짐이다.


박해일의 젠틀한 태도와 따뜻한 관심을 경험한 탕웨이는 난생처음 인간다움을 느꼈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꼈다. 그녀의 삶은 처절하게 낮은 포복, 철조망에 살을 베이며 기어가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빛이 된 존재가 박해일이다. 그런데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피의자’ 신분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무모한 선택을 한다.



사랑을 만나서 붕괴되는 체험을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사랑이 찾아올 때 양가적 감정이 병존하는 것은 알고 있다. 그건 이전의 내가 더 이상 그대로 머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가 내 안에 들어올 때 환희와 동시에 고통도 느껴진다. 그 고통을 ‘사랑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고통이 너무 크면 그건 건강한 사랑이 아니다.


건강한 사랑은 인간을 더 큰 존재로 성숙시킨다. 그러나 파괴적 사랑은 내 존재를 무너뜨리고 처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이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시작부터 꼬였다. 특히 박해일에게 다가온 탕웨이라는 여신은 그의 무의식까지 건드리며 영혼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청명한 가을날 낙엽을 밟으며 걷던 한 남자가, 혹은 한 여인이 무언가 가슴을 헤집고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공연히 마음이 산란하여 일이 손에 안 잡힐 때, 그래서 내가 왜 이런가 자문하게 될 때, 마음에도 없는 생각들이 본의 아니게 꼬리를 물고 일어날 때, 혹은 누군가가 못 견디게 그리워질 때, 그 또는 그녀는 무의식의 과정의 내적 객체를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한길사).”




흔히 소울메이트라고 부르는 대상은 대개 무의식의 영역에서 에너지를 불러낸다. 특히 남성 안에 존재하는 여성적 요소이자 고대 철학에서, 생명ㆍ사고의 원리가 되었던 영혼이나 정신을 뜻하는 아니마(anima)가 자극되는 순간 더 이상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박해일이 13개월간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상사병과 우울증을 경험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니마 기분은 감상적 기분, 우수, 음산한 예감, 허무함, 쓸쓸함에서 폭풍 같은 분노, 격렬한 열정, 대환희의 감정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여신들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또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난다. (중략) 아니마의 원형(原型)적 측면이 자극되면, 그 작용의 파장은 엄청나게 커진다. 아니마 원형과 함께 우리는 신들의 세계, 혹은 형이상학이 예약해 놓은 영역으로 들어선다. 아니마가 접촉하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이 된다. 즉 절대적이며, 위험하고, 금지된, 마술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무의식과의 작업에 대해 확신을 주는 이유들을 제공하며 도덕적 억제를 파괴하고 막았던 힘을 풀어놓는다. 차라리 무의식에 두어야 했을 것들을(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한길사).”


무속적 접신을 멀리하라는 이유는 우리 내면의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게 인간에게 위험하기 때문이다. 박해일은 견딜 수 없는 위험한 사랑이 두려워 여신에게 저주의 살을 날린다. “나는 당신 때문에 붕괴되었어요.” 탕웨이가 진짜 악녀였다면 박해일을 없앨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에게 사랑이라는 언어를 배웠다. 그리고 파국을 수습하려고 계획한다. 그건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는 신의 섭리와도 상통한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중략)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김승옥, 무진기행)"


“무진기행”의 주인공은 결국 현실을 택하고 사랑을 등진다. 무진 대신 등장하는 이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전해진 마음은 거둬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랑의 씨앗을 받은 사람은 마음속에 싹을 틔운다. 이 세상에 그렇게 엇갈린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가. 태산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을 것이다. 그렇게 어긋난 사랑은 오늘도 통곡하며 안개처럼 우리 곁을 지나간다. 그래서 노을 지는 태양이 더욱 스산하고 요동치는 파도의 슬픔이 애잔한 것이다. 


기대가 컸던 박찬욱표 러브스토리는 스릴러(친절한 금자 씨)로 시작해서 코미디(아가씨)를 거쳐 결국은 격정적인 순애보(박쥐)로 막을 내린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에 로맨틱 코미디적 반전을 기대했다. 왜냐고? 그가 개그우먼 김신영을 기용했기 때문에. 하지만 끝내 반전은 없었다. 대신 정훈희의 '안개'가 처연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중략)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 김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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