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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Sep 14. 2023

<리플리>의 질투

부러우면 지는 거다


인생의 라이벌 같은 친구 C.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 동창인데 단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어 본 적이 없는 기묘한 인연의 친구. 초등학교 6학년 때 흠모하던 여학생의 생일에 우리 반 친구와 나만 초대된 줄 알았더니 다른 반인 C도 참석을 해서 묘한 배신감을 느꼈던 생각도 난다. 중학교 때 성적은 내가 앞서나갔으나 고교 때 역전당했다. 같은 독서실에서 그가 집중해서 공부하는 걸 물끄러미 보면서 마음이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대학 입학 후 C는 내가 가려했던 동아리에 먼저 가입했다. 어느 동아리에 가입할까 주저하고 결정 못하는 나와는 달리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어려운 고민 끝에 나도 그 동아리에 가입했더니만 C는 곧 동아리를 탈퇴했다.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도 1년을 버티다가 하차했다. 4학년 때 전공을 살려 이공계 대학원을 갈까 기자가 될까 고민하던 중에 글쓰기 특강에 참석했는데 C가 먼저 와서 앉아있었다. 왜 왔냐고 물으니 그는 이과전공을 접고 카피라이터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언제나 한 박자 빨랐다. 누가 보면 내가 그 친구의 뒤를 졸졸 따라다는 것처럼.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일약 스타반열에 올랐던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1999년작 <리플리>를 보는데 C를 부러워했던 나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리플리가 잘하는 건 세 가지. 거짓말, 서명위조, 다른 사람 흉내내기. 원제목인 talented는 '재능 있는'이라는 뜻인데 재능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리플리는 남의 흉내를 넘어서 남이 되고자 했다. 결국은 남의 정체성을 베껴서 남이 가진 걸 빼앗으려는 사이코패스. 그런데 본인이 하는 행동을 멈출 수가 없다. 그는 왜 그렇게 사는 것일까.


대학 졸업 후 C의 소식은 잘 들리지 않았다. 전공대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매일 같이 밤을 새우느라 후줄근한 모습이던 어느 날 버스에서 C를 만났는데 그의 삶은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원했던 카피라이터가 되어 있었다. 당시로는 최고의 광고회사에 다닌다는 것. 깔끔한 옷차림과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이 또 부러웠다. 무엇보다 자기가 하고픈 일을 찾아서 길을 바꾼 그의 용기가.


우리는 자아 정체성이라는 걸 갖고 산다. 이 정체성은 존재의 근간을 이루면서 삶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좌표다. 물론 정체성은 고정되지 않고 성장하면서 확장되어 간다. 직장에서의 정체성, 가정에서의 정체성, 사교모임에서의 모습,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 보일 수 있지만 크게 다를 경우는 분열의 위험이 있다. 리플리는 남의 흉내를 내고 그가 좋아하는 걸 미리 연습해서 그의 마음에 쏙 들도록 하는데 그 동기가 매우 사악하다. 한 사람을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욕망, 내 영향권에 두고 움직이면서 나 없이는 못 살도록 만드는 질척거림의 시작이었던 것. 결국은 서서히 선을 넘고 상대방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려고 하자 상대인 디키는 불편함을 호소한다. "너는 거머리 같은 놈이야." 리플리는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피아노 조율사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고 '초라한 자신보다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게 낫다'라고 본격적인 결심을 하면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SNS에서 드러나는 남의 재능과 부를 비교하면서 우리는 질투한복판에 내몰린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게 유행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도 모른다. 또한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아님에도 주변에서 손뼉 치니까 점점 더 그 길이 자기 정체성에 맞는 길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의 멋진 휴양지와 로마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범죄 스릴러의 고전 <리플리>는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다. 주어진 삶에서 적당한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 정상적이다. 그런데 어느 날 찬란해 보이는 유혹에 사로잡히고 질투가 지나쳐 무리수를 두면 자신의 정체성은 무너진다. 아무리 흉내를 잘 낸다 해도 DNA를 바꿀 수는 없고 그의 바위 같은 존엄은 내 것이 될 수 없는 법. 자신의 모습으로 생을 완주하는 것은 남이 보기엔 비록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위대한 것이다. 겸손하게 자신의 짐을 지고 가는 여정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에. 그런 평범한 삶을 사는 모든 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오늘 인터넷에서 C를 검색해 보니 그는 또 진로를 바꿔 한 이벤트 회사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또 다른 화려한 변신이 의아했지만 이제 더는 부럽지 않았다. 난 지금 내 삶에 만족하니까. 비록 느리지만 결국 나는 나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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