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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Sep 16. 2023

<말죽거리 잔혹사>의 선빵

따까리 새끼들은 빠져



<말죽거리 잔혹사>를 그토록 애정하는 이유는 80년대 나의 학창 시절 이야기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모든 권력이 교장으로 통했다. 월요일 조회시간에는 밴드부가 관악기를 동원한 반주를 하는데 거의 국군행사 같았다. 교장은 거수경례를 한 채 좌우로 180도를 돌며 매의 눈으로 학생들을 주시했다. 그때 부동자세를 푸는 순간 고함이 쏟아진다. “야, 이 새끼야 똑바로 안 서있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정문고교는 강남 모고교의 실상이었다. 유명한 사학비리의 온상, 강남 노른자 땅으로 부자가 된 학교는 학생들을 돈과 권력의 줄로 활용했다. 교사들은 욕설과 폭력, 음담패설을 쏟아냈고 학생들은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당시 군사독재의 횡포는 캐비닛에 현수(권상우)를 넣고 밟는 교련교사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스승은 그림자도 안 밟는 거야. 이 개새끼들아. 내가 월남전에서 잡은 베트콩이 몇 명인 줄 알아?"


우리 교련선생도 늘 언어폭력과 빠따스윙을 쉬지 않았다. 그에게 들은 월남전 스토리는 참혹했다. 교전중에 젊디젊은 병사 옆에서 수류탄이 터졌는데, 잠시후 병사가 걸어나오는데 좀 이상하더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전투신처럼 복부의 내장이 다 튀어나온 그 병사의 마지막 한마디는 "중대장님! 진격할까요?"였다. 어쩌면 교련교사도 정신적 피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교장의 행동은 지나쳤다. 학교장 5대 과제가 있었는데 한자 쓰기와 일기 쓰기는 최우선순위. 교장이 직접 일기장 검사를 했는데 남의 일기를 일일이 읽어보는 기이한 행동을 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보여주기식 일기를 썼다. 그게 싫어서 일기숙제를 안 하면 몽둥이찜질을 각오해야 하니까. 한 눈치없는 친구가 일기에 "나는 사실 일기장이 두 개다."라고 쓴 게 들켜서 교장에게 엄청 맞았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수많은 짧은 영상이 많지만 이 영화는 첨부터 끝까지 보기를 권해드린다. 그래야 장르적 쾌감이 하나로 뭉쳐 오롯이 소화되기 때문이다. 학원액션, 이소룡과 새로운 영웅의 탄생,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첫사랑 이야기. 당시 국민 첫사랑 한가인은 청춘들의 심장을 충혈시켰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은 로맨스가 아닌 영웅의 탄생이었다. 단지 불량배들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어둠 속에 있던 시절, 부패한 폭력이 학교에서도 위력을 발휘할 때 그 *같은 학교를 부수기 위해 절권도의 히어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홍콩스타 진추하의 명곡 "Graduation tears"가 흘러나온다. 가사에 ‘이 사악한 세상(wicked world)에서 나는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렇다. 이 험한 세상에서는 낭만적 감성만으로는 안된다. 마초적 방어력을 가져야 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진추하로 표현되는 멜로와 이소룡으로 대표되는 액션을 적절히 섞었다. 그런데 이 묘한 케미가 봐도 봐도 절묘한 것이다.


이소룡은 왜 당시 최고의 스타였을까. 검은 교복에 군사문화가 깊이 깃든 학원 내의 폭력적 구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소룡 같은 강한 무도를 갖춰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때의 형님들은 맥락 없이 헐렁이는 사춘기 감성 위로 근육을 키웠다. 진추하의 브로마이드를 끼고 다녔고, 동시에 이소룡의 절권도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닌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마초가 되는 것은 교복으로 표현되는 획일화된 문화와 주먹부터 성적까지 서열주의로 점철되는 이 ‘사악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지켜주는 쌍절봉에 다름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짜릿했던 장면은 현수가 절권도를 연마한 후 학교짱인 종훈에게 한판 붙자는 순간이었다.

혀 짧은 목소리로 선전포고를 하는 현수.


"야, 이 개새끼야. 니가 그렇게 따(싸)움잘해?. 따라와 옥땅(상)으로..."

그때 "어디서 *도 아닌 새끼가 깝죽대"라고 코웃음 치는 조진웅에게 던지는 촌철살인의 메시지.

"따까리 새끼들은 빠져!!"

아, 이런 사이다 같은 대사라니. 나는 가끔 혼자서 이 대사를 되뇌곤 한다.


현수의 쌍절봉은 두 개였다. 하나는 선빵을 위한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집단구타에 대비한 최후의 방어를 위한 것. 사악한 세상에서 현수 역시 사악한 선빵, 뒤통수를 갈긴다. 어떤 악이 더 큰 것인지는 관객이 판단한다.


얼마 전 직장에서 심하게 갑질을 당한 날, 울분을 참기가 힘들었다. 빌런은 원래 그렇다 치는데 옆에서 거드는 자들은 정말 진상이었다. 따. 까. 리. 새. 끼. 들은 좀 빠지란 말이다.


그런 날은 소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반드시 노래방에서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제가를 불러야 했다. 김진표의 “학교에서 배운 것”이란 노래를 부를 때 나는 학창 시절부터 노출된 폭력과 사회생활 중 겪은 횡포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조용히 쓰다듬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 / 유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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