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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Aug 28. 2023

<레슬러>의 생존방식

미키 루크를 다시 만났던 어느 날


왕년의 스타 레슬러 랜디 더 램(미키 루크). 1989년 챔피언에 등극한 이후 20년이 지나 이젠 퇴물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를 잊지 못하는 팬들은 그의 매너와 테크닉에 열광했다. 어린이부터 어른, 그리고 장애인들에게 그는 악당을 대신 응징해 주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한물가면서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형마트에서 짐을 나른다.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한 미키루크를 20년 만에 만났던 <레슬러>



랜디의 유일한 쉼터는 술집, 거기서 스트리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에게 마음이 기운다. 하지만 그녀는 손님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대신 심장이상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랜디에게 레슬링을 그만하고 대신 딸을 찾아가 만나보라고 권한다. 랜디는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철 우드)를 찾아가지만 유일한 혈육인 자기를 버린 아빠를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연출하여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등 영화제를 휩쓸었던 작품 <레슬러(2008)>를 넷플릭스로 다시 만났다. 일단 이 영화는 청불등급이다. 스트립쇼도 그렇지만 레슬링 경기 중 하드코어 경기장면은 잔인하다(심약자들은 참고하시라).



“레슬링은 쇼라고 하던데”라는 캐시디에게 랜디는 온몸의 상처를 보여주며 설명한다. “이건 의자의 못에 이두박근이 찢어져서 꿰맨 상처야. 링 밖으로 던져져 쇄골과 어깨가 부서지기도 했지.” 그러자 캐시디는 갑자기 구약성경 이사야의 구절을 읊는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랜디가 “뭔 소리 하는 거야?”라고 묻자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야기라며 예수가 2시간 동안 죽도록 매 맞는 이야기라고 대답한다. 랜디는 짧게 답한다. “상남자네...”



언젠가 친구가 오지 오스본이라는 기이한 하드로커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그는 공연 중에 비둘기의 목을 꺾고 살아있는 닭을 입에 물고 악마 퍼포먼스를 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마신봉자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그는 골수팬들은 확보했다. 나 역시 그의 공연이 불쾌하다고 말했는데 친구는 답했다. “실제로는 따뜻한 아빠이고 남편이래. 돈 벌려고 쇼하는 거야.”


우리들은 가끔 우리의 본모습과 일터에서의 자아를 혼동한다. 먹고살기 위해 때로는 누구나 영혼을 팔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우리의 진짜 자아는 아니다. 그게 헷갈리는 순간 삶은 어그러진다. 캐시디 역시 밤엔 누드쇼로 돈을 버는 스트리퍼이지만 9살 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골몰하는 엄마이기도 하다. 직업윤리가 있지 않냐고... 그걸 알면서도 출근해야 하는 입장에 대해선 생각해 보셨냐고 묻고 싶다. 



랜디의 링과 캐시디의 클럽은 어쩌면 유사한 곳이다. 관중들은 환호하고 거기서 삶의 에너지와 수입을 얻는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견디기 힘든 밑바닥 인생이다. 이를테면 온갖 폐수가 뒤섞인 강하류에 서식하는 물고기의 삶이다. 랜디는 온몸의 통증을 견디기 위해 진통제, 항생제, 스테로이드를 포함한 약물에 의존한다. 캐시디는 나이가 들어 인기가 없어지면서 손님들에게 거절당하자 좀 더 과감한 쇼에 도전한다. 


한편, 2009년 <레슬러> 개봉 때 내가 받았던 충격은 미키 루크라는 배우의 변신이었다. 1986년 1월, 나는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이어 오브 드라곤>이라는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갔다. 미키 루크라는 배우를 처음 만난 게 그 영화였다. 남자는 핸섬했고 아내를 죽인 원수를 복수하는 형사 역으로 출연했었다. 그 후속작인 <나인 하프 위크>로 미키 루크는 대박이 났다. 할리우드 최고의 섹시가이로 등극하면서 출연료로 수백억 원을 받는 스타덤에 오른다. 계속 그렇게 사는 줄 알았던 미키 루크와 20년 만에 스크린에서 만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 마이 갓.

'... 썸 씽 wrong 위드 유... 미키 맞아?'

더 이상 <와일드 오키드>의 섹시 가이가 아닌 K-1의 밥 샙처럼 변해 버리다니.

영화가 끝나고 난 서둘러 그의 히스토리를 거꾸로 뒤져보기 시작했어.

그랬더니 이게 뭐람..

난 그가 화려한 성공가도를 달려온 줄만 알고 있었는데 그때 이후 이렇다 할 대표작도 없었어. 게다가 난데없는 프로복서로 살았다니.. 이어지는 성형부작용까지.

그의 히스토리를 읽으면서 '레슬러'는 다름 아닌 미키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지.

인생은 화려한 레드카펫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만 하는 외로운 싸움터란 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냉정한 심판이 있고, 마트에서 손님들의 변덕에 일일이 답하다가 실수로 손을 베이고 열폭하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란 걸.

하지만 다시 돌아온 그에게 난 박수를 보냈어. 

그는 자신이 원해서 권투선수가 되었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자신의 본모습을 찾아 분투하는 살.아.있.는. 인간임을 입증하고 있기에.

다만, 너무나 섹시했던 그 젊은 미키가 이렇게 달라진 그 변화의 무게만큼은 가슴을 온통 휑하게 만들었어.



랜디는 1989년에 벌였던 마지막 경기의 재시합을 하자는 제의에 응하지만 심장이상으로 포기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정육점에서 알바를 하며 딸과도 친해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링을 떠난 세상은 냉혹했고 적응하려다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자기를 알아보는 손님들과는 죽어도 마주치기 싫었다. 그래서 그는 일상생활을 벗어나 다시 링으로 향한다. 걱정하는 캐시디에게 랜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에겐 상처 입어도 링에서는 안 다쳐..”


늙어서 보청기를 꽂고 돋보기안경을 쓰고 염색을 하며 경기준비를 하는 랜디. 그는 예정된 경기에 출전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로프탑에 올라 상대에게 다이빙하는 필살기 “램 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오랜 방황을 거친 미키 루크는 당시 57세의 나이로 스크린에 복귀한다. 권투로 망가진 몸도 성형부작용도, 날려버린 재산도 그의 투혼적 연기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인생을 랜디라는 캐릭터에 담아 전무후무한 감동을 이끌어 냈다. 어느덧 나는 랜디를 연호하는 관중처럼 극장에서 미키루크를 향해 존경의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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