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벗은 구대장님

대안 12 : 작은 약속을 소중히 하라

by 블루문


1987년에는 문무대라는 것이 있었다. 정확한 명칭은 성남의 학생중앙군사학교. 거기서 1주일간 병영훈련을 했다. 대학교 1학년 입학 후 한 달이 지나 군체험을 하도록 만드는 건 아마도 군사정권의 의식화 방지용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사회과학대학 친구들은 병영거부를 하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는 우리 공돌이들은 그저 여친들의 손 편지를 받는 기쁨에 들떠 있었고 11미터 위에서 애인이름을 부르며 뛰어내리는 막타워를 놀이기구처럼 재밌게 탔다.



우리를 일주일간 돌봐준 구대장 -소위- 형님과 재밌는 얘기도 나누었고 정이 들었다. 그래서 누군가 손을 들고 제안을 했다. 정확히 퇴소 한 달 후 토요일 12시에 학교 기념물 앞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구대장은 끝까지 우릴 잘 챙겨주었고, 우리는 무사히 퇴소를 했다. 일상에 복귀해서 정신없이 공부하고 중간고사를 치렀다. 그는 끝까지 모자 벗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한 달 뒤 만나면 보여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날이 왔다. 난 약속장소인 학교 기념탑 앞에 좀 일찍 도착했다. 당연히 동기들이 모여있을 것으로 생각한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혼자 앉아있기가 뭐해서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정해진 시간이 됐다. 그리고 잠시 후 구대장이 도착했다. 모자 벗은 구대장이었다. 모자를 벗었지만 그 선한 눈빛과 날 선 콧날만 봐도 단번에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멀리서 안타깝게 그를 바라보며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가려고 했다. 근데 삼십 분이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자 구대장은 아쉬운 표정으로 쓸쓸히 자리를 떴다. 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손들고 약속 잡자고 주도한 친구는 왜 안 왔을까. 너무나 무심하게 느껴졌고 동기들에게 실망했다. 물론 용기를 내어 구대장에게 인사하지 못한 나에게도 실망했다. 그땐 왜 그랬을까. 나는 숫기가 부족했다.


지키지 못한 인생의 약속은 그 이후에도 많았지만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그래도 기다린 덕분에 모자 벗은 구대장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잘 지내시죠? 구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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