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좇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2023.04

by 인표

m.1

1. 세 종류의 검이 있다 : 플러레, 에뻬, 사브르

3. 검은 일반적으로 사용자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제작되어야 한다. 꼬끼유에서 부똥사이의 람므에 대한 홈 포함 모든 교정 작업, 즉 연삭기나 줄질, 가열 또는 그 이외의 방법 역시도 금지된다.

대한펜싱협회, <2023 대한펜싱협회 경기규칙서>, 2023, 106p


“펜싱은 내게 무지개를 좇는 것과 같았다. 따라가려고 아무리 무지개를 보고 뛰어가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슬프지 않고 재미있는 것처럼, 나에게 펜싱은 그렇게 다가왔다.”


펜싱에 대해 내가 쓴 글들을 찾다가 발견한 문장이다. 막 펜싱을 시작했던 2015년 여름방학을 돌아보며 쓴 글이었다. 그 여름방학에 신입부원은 거의 나 혼자밖에 없었다. 연습경기에서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모두 졌다. 그러나 패배했다는 것보다 그 속에서 해내는 동작들이 뿌듯하고 기뻤다. 내 동작 하나하나를 상대에게 물어보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두 달 뒤에 조심하라고 호기롭게 말하고 다녔다. 지금은 못 이기겠고 두 달 뒤에는 성장해서 이기겠다는 선언이었다. 지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으니, 동작에 거침이 없었다. 마치 RPG 게임에서 초보자 시절에는 죽어도 경험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지면 본전이고 이기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졌지만, 그 과정이 슬프지 않고 재밌었다. 나는 그게 올바르게 펜싱을 즐기는 법이라 믿었다.

꽤 최근까지 그렇게 펜싱을 했다. 지는 것에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았고 이기는 기쁨만을 취했다. 펜싱이 잘되지 않아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겼다. 늘 이기던 상대한테 지더라도 ‘그 친구 요새 열심히 했지’ 하고 말았다. 펜싱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 펜싱은 내게 재밌는 도구였다. 펜싱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 인생의 메인 챕터에 들어왔지만, 막상 펜싱에게 내 인생의 메인 챕터를 허용하지는 않았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패배에 아파하는 주위 사람들을 다독였다.

펜싱을 열심히 한 사람들은 그만큼 패배에 더 아파했다. 펜싱부에서 펜싱을 같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배우는 속도를 서로 비교하기가 너무 쉬웠다. 자기보다 열심히 나오지 않은 동기나 후배에게 지는 것에 특히 그렇게 분해했다. 펜싱부에는 그동안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다가 펜싱을 첫 운동으로 시작한 펜싱부원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특히 더 신경 썼다. 그 친구들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쳐 펜싱을 연습해도 드문드문 연습을 나왔던 부원에게 패배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거기에 다가가 패배 때문에 네 노력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펜싱은 모두가 살아생전 안 해본 동작을 해보는 운동이다. 저 잘하는 얄미운 애들은 이미 중고등학교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면서 자기 몸을 많이 움직여 봤을 거다. 우리 그 시간을 인정해 주자. 그리고 그 시간까지 따라잡아 보자.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최근에는 펜싱을 즐기기만 하는 것이 펜싱을 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느낀다. 내 주위에 펜싱을 마냥 즐기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무지개가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 답답하며 슬프고,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하게 되고, 분통이 터져서 울음이 나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리고도 결국 무지개를 향해 상처투성이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멋져 보였다.

게임을 지고 나면 무조건 억울해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처음에는 늘 그랬듯 그 억울함을 해소해 주려고 했다. 상대가 잘했다든지 경기는 졌어도 너도 잘한 포인트들이 있다든지 같은 이야기들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억울함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애초에 나는 그 친구의 응어리진 억울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친구는 그 친구보다 펜싱을 오래하고 열심히 한 사람에게 져도 분해하고 억울해했다. 내가 헤아리는 억울함과 종류가 달랐다. 내가 그 친구였다면 ‘져도 본전’이라고 생각하는 경기의 패배에서 그 친구는 억울함을 느꼈다. 공감하지 못한 그 억울함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내가 ‘져도 본전’이라고 생각하는 경기도 ‘무조건 이긴다’는 마음가짐으로 붙었다.

지고 분해하는 것에서 어디 빠지지 않는 또 다른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22년도 1학기에 학교 동아리에서 펜싱을 처음 시작한 내 펜싱부 후배다. 이 친구는 처음에 에페라는 종목으로 펜싱을 시작했다. 여름방학에 들어서야 내가 하는 플뢰레로 종목을 바꿨다. 그런데 한 학기 내내 플뢰레를 한 친구한테 지고 진심으로 속상해했다. 풀이 확 죽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 속상함을 여름방학 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 친구는 속상해하면서도 여름방학 내내 일주일에 세 번씩 펜싱을 나왔다. 그렇게 새 학기가 되었을 때였다. 나는 2022년 2학기의 새로운 신입부원을 또다시 가르치고 있었다. 신입부원들에게 기본자세를 가르치다가 잠깐 물 마시라고 쉬는 시간을 줬다. 그때 이 친구가 옆에서 연습 경기를 지고 그 길 그대로 뚜벅뚜벅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는 “선배, 레슨해주세요.”하고 말했다. 나는 내가 다른 신입부원들을 뻔히 가르치고 있는데 한 학기를 지나 이제 선배가 된 본인을 레슨해달라고 말하는 그 뻔뻔함이 웃겨서 실실 웃고 말았다. 그렇게 옆의 상황을 헤아리지 못할 만큼 강렬한 승부욕에 휩싸인 친구를 바라봤다. 눈빛에 펜싱을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이글이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날의 신입부원 레슨은 다른 친구에게 맡기고 그 친구의 레슨을 잡아줬다.

펜싱 대회를 나가면서 알게 된 한 펜싱 동호인의 인스타그램도 인상적이었다. 펜싱 동호인 중에 최상위권의 실력자이면서 엄청난 노력파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이 분과 인스타그램 맞팔로우를 하고 나서 어떤 펜싱을 하고 사셨나 피드를 둘러봤다.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펜싱을 대하는 진심의 크기가 더 크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지면 본전” 같은 마음으로 하는 나와 달랐다. 펜싱 동호인들은 중고등학교 엘리트 선수들이나 엘리트 선수 출신과 뛸 기회를 종종 가진다. 나는 동아리 선배한테도 “지면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연습 경기를 했다. 엘리트 선수들과 경기할 때는 경기를 뛰어줘서 고맙다는 마음으로 경기를 해왔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경기했다. 이분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선수와 경기하더라도 같은 펜싱인으로 진지하게 승부에 접근했다. 이기기 위해서 경기를 했다.


무지개를 좇는 것 같다는 비유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무지개가 태양 빛의 파장을 분리해 망막에 맺히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무지개가 떠 있는 그곳에 무지개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무지개가 떠도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 찍고 만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무지개를 좇는 것은 가까워지지 않아도 슬프지 않은 일이라 비유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무지개를 좇았던 어린 시절에는 가까워지지 않는 무지개를 보고 슬퍼했다. 무지개를 좇을 생각이 없어졌기에 무지개가 가까워지지 않아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펜싱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나는 펜싱에서 아프지 않을 수 있었다. “지면 본전”이라는 방패로 패배를 회피하며 즐기기만을 택하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슬픔과 스트레스였고 가질 수 없었던 욕심과 욕망이었다.

나는 펜싱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 정도의 일이었기에 아파하지 않았다. 나는 내 세계 안에 자리를 차지해 내 자아의 일부로 작동하는 것들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내 세계 밖에 그저 ‘좋아하는 것’으로 남은 일들은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이름 붙이는 일에는 추잡한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질척이게 된다. 펜싱이 이미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날 것의 감정까지 펜싱에 바친다. 그들은 펜싱을 사랑했다. 무지개를 좇으며 아파했다. 그럼에도 펜싱을 했다. 나는 펜싱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이 아파하는 것들에 같이 아파했고 그들과 같이 오랜 기간 펜싱을 했다. 펜싱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랑하면 닮는다는 닳고 닳은 레토릭이 작동한 걸까. 최근에는 무언가 달라졌다.


작년부터 나도 패배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초보자 보호기간은 다 끝난 걸까. 어느새 8년이 넘는 시간이 쌓였다. 패배 한 번 한 번이 아팠다. 별 부정적인 감정이 다 들었다. 한 번 지고 나서는 자동으로 몇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나를 이긴 사람이 펜싱 실력이 좋아서 이 패배를 인정할 만한지, 이 경기가 내가 기술을 연습하고 시험하는 경기였는지, 오심으로 생각할 만한 건 없었는지, 내 칼이 이상하게 불이 안 들어온 게 있었는지. 내 펜싱 실력에 대한 자존심을 세웠다. 그런 생각들이 들 때마다 화들짝 놀라 내 안에 꼭 잡아두고 소화하려 했다. 하지만 꼭 몇 개씩은 입 밖으로 툭 튀어 나갔다. 무지개 쫓기는 확실히 아니다. 이제는 좁혀지지 않으면 좁혀지지 않는 것에 성을 내고 슬퍼하고 있다. 작년에 대회에서 한 번 크게 지고 온 날에는 펜싱 대회에 계속 나가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펜싱대회가 진짜 재미없었다. 즐기지 못하는 일들을 참가비 내고 이른 아침부터 멀리까지 가서 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나는 대회를 왜 나가는지 고민했고, 앞으로 대회를 나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대회 신청일이 다가오면 대회를 신청했다. 대회와 펜싱 모두 놓지 못했다.

좋아하다 마는 것은 쉽지만 사랑하다 마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일부를 끊어내는 일이다. 나는 펜싱을 끊어내지 못했다. 나는 결국 8년 동안 어떻게든 밖에 두었던 펜싱이 느지막이 내 세계로 들어왔다는 걸 인정했다. 자존심에 투정을 부리다가 그 사랑을 알아챘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옆에 아무 생각 없이 두고 지낼 수 있던 펜싱이 이제는 날 아프게 한다. 이런 방법은 펜싱을 효율적으로 즐기는 방법은 아니다. 펜싱을 가장 효율적으로 즐기는 방법은 2015년 여름방학에 생각했던 무지개를 좇는 이미지 어딘가에 있다. 한 발짝 떨어져서 아픈 것들은 미리 피하면서 아름다운 부분들만 취하며 즐겁게 사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펜싱을 사랑하는 방법도 아니고 사랑하며 사는 방법도 아니다. 펜싱을 사랑하는 삶을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찔리고 찐득찐득한 진흙에 발이 빠질 길이다. 그 끝에 무지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그러니 이번에는. 진심으로 무지개를 좇을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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