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되어 일거리가 많아 지방에서 많은 사람이 상경했다. 대부분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순진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사기꾼 때문에 조심하라는 뜻으로 ‘서울은 한눈팔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한 시절이었다.
흥분과 기대, 불안과 걱정, 미지의 세상에 대한 동경하는 마음으로 11시간 정도 걸려 완행열차(나중에 비둘기호로 명칭 변경됨)를 타고 전라남도 시골에서 서울로 고1 때 전학을 왔다.
첫날 “000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소개하고 담임선생님이 정해준 자리에 앉았다. 짝꿍은 서울 토박이로 시골뜨기인 나를 서울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마포에 있는 아이스하키 명문고이다. 학교서 단체로 응원을 갈 때면 각자 버스를 타고 경기장으로 가야 했는데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나를 챙겨 데려가 주었다. 친구 덕에 학교생활 등 서울살이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의 전도로 교회를 다녔다. 고2 여름방학 때 수련회에서 연극을 하게 되었다. 대사를 외우기는 했는데 막상 무대에 서니 처음 해 보는 연극이라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잠깐 정적에 쌓였다. 그때 친구가 살짝 알려 줘 위기를 면한 기억이 있다. 늘 함께했고 시골에서 자라 세상 물정 등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잘 챙겨줘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2 때 경주로 수학여행 가기 하루 전날 “나랑 약속할 것이 있다. 담배는 수학여행에서, 그리고 입대해서 배운다는 말을 어른들에게서 들었는데 우리 영원히 담배는 피우지 말자!”라고 했다. 그 언약을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난 대학에 바로 입학했다. 친구는 재수하고 다음 해에 서울의 명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다. 대학교가 대중교통으로 30분 거리여서 자주 만났다. 친구가 2학년이 되고 난 군에 입대했다.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화곡동의 지가가 비쌌다. 친구는 화곡동의 마당에 잔디가 깔린 단독주택에서 살았었다. 자주 방문했고 식사도 하고 마당에서 운동도 하곤 했다. 군 말년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포의 허름한 지하 방이었다. 당당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초대한 친구의 모습을 보고서 나였으면 아마도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을 텐데...... 의외였다.
전역 후 난 복학했고 그 친구는 군 면제를 받고 대학원에 입학해서 만남이 소원해졌다. 난 졸업하자마자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그리고 결혼을 바로 한 관계로 그 친구와의 연락은 끊기고 말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15년이 지난 시점에 동창회에서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친구는 오지 않았다. 동창들에게 수소문했지만, 소식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 후 3년 지나 동창회에서 친구의 이 세상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평소 간염이 있었는데 그로 인한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야속했고 학창 시절의 내 추억을 나눌 친구의 실종이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 난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은인이며 멘토였고 혈혈단신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절, 나의 벗이자 선배 역할까지 도맡아 준 친구 ‘김영배’ 깡마르고 큰 키에 미소로 대해 준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영배야!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