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9일이었다.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내 눈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억울함 때문이다. 수많은 민주 열사가 피와 땀으로 성취해 낸 선거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대통령 선거인데,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게 원통하고 비통했다. 당시 나는 출산한 지 2주째였고, 산후조리원에서 감금(?)생활 중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 주변 지인들은 투표하러 가는 걸 다 반대했다. 신체 회복에 신경 써야 하고, 대중이 모인 곳에 가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니 산후조리원에서의 시간은 투표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십여 년이나 알고 지내면서, 내가 투표를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는 지인에게 전화해서 투표장에 가도 될지 물었다. 역시 부정적이었다. 아마 그가 나처럼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하지 않았더라면, 조언을 무시했을지도 몰랐다. 결국 나는 선배의 의견대로 조리원 건물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유권자들이 몰리지 않을 오전 6~7시 사이를 노렸다. 택시를 타든 날아가든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던 나의 작은 기대는 막상 수유 시간과 딱 겹쳐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야 말았다. 양보해야 하는 것이 왜 하필 내 선거권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부당함을 껴안고 지내던 차에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를 알게 됐다. 내 지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프로그램인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였다. 그날의 강연은 여성 인권이 주제였고, 이 교수는 영화 <서프러제트>를 소개했다. 영국 여성들이 투표권을 획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내용이다. 제목은 ‘여성참정권 운동가’라는 뜻이고, 20세기 초 서구권 국가에서 벌어진 여성참정권 운동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교수의 강연을 본 지 2년쯤 지났을까.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서프러제트>가 방영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내가 산욕기 때 놓쳤던 선거권이 굉장한 가치가 있다는 게 되새겨졌다. 실물 한 번 본 적 없는 이 교수가 너무나 감사했고, 나는 마치 새로운 세계로 안내받은 듯했다.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나의 인권 의식은 후진국 수준으로 머물러 있었을지 모른다. ‘저렇게 목숨까지 바쳐 선거권을 쟁취했었단 말인가?’ 놀라웠고, 슬펐고, 대단했다.
20세기 초 한국은 일제강점기였다. 1948년 헌법이 만들어지고 정부가 수립되면서 우리나라 국민은 성별 차별 없이 참정권을 획득했다. 여성들에게도 선거권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 남성들만의 투표로 결정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투표권을 거저 얻은 것 같고 딱히 누구에게 감사한지 모르겠지만 빚을 진 것만 같았다. 한국의 여성 인권도 이전 세대의 부단한 노력으로 그나마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의식 있는 시민이었다는 자부심은 작아지고, 소수자의 선거권이나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은 확대됐다.
투표할 결심을 완수하는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내가 출산했을 때처럼 투표일에 산후조리원 생활 중인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해 찾아봤다. 안타깝게도 2022년 대선 때도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에 투표일이 있는데 투표할 방법 있나요?’라는 질문이 포털사이트에 올라와 있었다. 80년대생이 아니라 90년대생인 산모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니! 한숨이 나왔다.
관건은 시스템이 아닐까? 나와 비슷한 시기 산후조리원에 등록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투표할 결심을 하지 않았다. 조리원 식당에서 20여 명이 다 같이 모여 식사할 때도 투표하러 가겠다는 나를 다들 이상한 눈으로 봤다. 평소에는 꼬박꼬박 투표장으로 향했던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이상했다. 출산예정일 전에 미리 신청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면 그렇게 넋 놓고 투표권을 허공으로 날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부재자 투표라는 ‘시스템’이 생기니 투표할 수 있는 유권자가 늘어나지 않았던가. 그로부터 수년 후 부재자 투표의 번거로움까지 해소해 주는 사전투표제까지 생겼다. 제도가 발전하긴 발전한다. 그래도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나처럼 조리원 퇴소가 11일이면 9일에 있는 투표는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내가 겪은 부조리함을 내 다음 세대는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생각까지 온 그것만으로도 내 세계는 확장되고 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