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이기는 해도 내 신상에 큰 지장이 있겠나 싶었다. 지장이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 등원 차를 타기 전까지 목요일마다 EBS <곰끼와 처음 수학>을 기다리곤 했으니까. <곰끼와 처음 수학>이 결방이다.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하나 보다. 그렇다면 수능에 응시하는 학생들을 생각하라는 신의 계시인가.
20여 년 전 내가 19살일 때 수능 시험은 쉬웠는지, 어려웠는지 기억이 안 난다. (출산한 자의 특권, 뛰어나진 망각 능력 덕분이다.) 어렴풋하게 생각나는 것은 어제 저녁 뉴스에서 봤던 것처럼 수험생을 응원해 주는 부모님 정도다. 뉴스에서는 코로나 창궐 이후 4년 만에 후배들의 응원전이 등장한다고 했다. 물론 나도 고등학생 때 동아리 후배들이 있었다.
정작 나는 시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학교 선배인 준연 언니와 통화를 했다. 내가 먼저 걸었던가 그가 먼저 걸었던가. 그는 시험이 어땠냐, 먼저 물었다. 나는 국어부터 영어까지 과목별로 내가 겪은 난항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댔을 것이다. 시골 버스 안은 꽤 조용했었는데, 나의 목소리가 컸어도 누구도 눈치 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고사장에서 집까지 가는 그 30~40분 정도, 즉 부모님을 만나기 전까지 내 곁에는 그가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가 3살 차이라 같은 학교 소속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적은 없었다. 우리는 절에서 처음 만났다. 지역 사찰에서 운영되고 있는 청소년부에서 만나, 거의 매주 법회에 함께 참석하는 사이였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알았으니 고3까지 6년 정도 정을 나눠왔다. 심지어 그에게는 두 살 아래 여동생도 있는데, 우리가 당최 무슨 사이라고 내게 이렇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을까.
‘스트라이크히도니아’(strikehedonia)라는 말이 있다. 일을 다 끝마쳐서 더는 그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이라는 뜻으로, 영국에만 있는 말이라고 한다. 수능 시험을 끝마친 사람의 심정을 우리말 중에 떠올려 보자면 후련함일 텐데, 나는 기쁨을 느꼈다. 올해 처음으로 알게 된 이 단어, 스트라이크히도니아의 감정이 바로 그때였다. 성취감과 해방감까지 포함된 표현이리라.
시험이 끝난 후 그는 나와 통화했을 때, 나의 스트라이크히도니아를 나눠주고 있었다. 아무런 질투 없이 자기도 3년 전 거쳐왔을 그 감정을 함께 나눠 주었다. 아마 친자매가 있는 사람이면 이런 날 이런 감정을 함께 나누었으리라. 큰 시험이 끝난 후 내게 기쁨을 나눌 사람이 있었다는 게 새삼 고맙다. 올해 수능이 나에게 알려 준 것은 스트라이크히도니아와 그의 이름 석자 김준연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