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내가 타고 있는 버스는 별로 혼잡하지 않았다. 그래도 몇몇 승객은 앉을 자리가 없어 서 있어야 했다. OO 정류장에 도착할 즈음 사건이 일어났다. 버스가 딱 멈추었다. 친구로 보이는 2명의 초등학생이 급하게 하차 벨을 눌렀다. 앞문으로는 승객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뒷문 바로 앞에 서 있었던 터라 내리려는 데 시간을 길게 지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뒷문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급기야 한 명이 ‘뒷문 열어주세요’라고 요청했다.
버스 기사는 화가 났는지, 두 학생을 앞문 쪽으로 오라고 소리쳤다. 그들이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가자, 기사는 벨을 미리 누르라고 야단쳤다. 학생들을 꾸짖은 것이다.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말이다. 그러고는 앞문으로 내리게 했다. 뒷문을 열어달라는 요청은 무시된 셈이다.
뒷문 근처에 앉아서 이 광경을 본 나는 굉장한 불쾌함을 느꼈다. 갑자기 그 학생들로 감정이 이입돼 창피하고 억울한 마음마저 생겨났다. 만약 그들이 초등학생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키가 170cm쯤 되는 교복을 입은 청소년이었어도 이랬을까, 50대 남성 두 명이었어도 그랬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시간상 충분히 뒷문을 열어줄 만했기 때문이다. 벨소리 듣고도 버튼 하나 조작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물론 기사 역시 일하다 보면 귀찮은 상황에 짜증이 날 수도 있다. 그런데 다음 정류장으로 출발해야 하는 본업보다 차를 세워두고 어린 학생들 나무라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는지 묻고 싶었다.
한 달 내내 느꼈던 이 불편한 감정의 이유를 5월이 되고 나서 알았다. 어린이날쯤에 내가 알게 된 몇몇 사실 덕분이다. 100여 년 전 방정환 선생은 ‘늙은이’ ‘젊은이’라는 말과 대등한 의미를 갖게 하려고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러니까 어린이가 높임말이다. 그전에는 애놈, 아들 새끼, 딸년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제1회 어린이날 공포식에서 ‘어른에게 드리는 글’이 배포됐다. 그중 4번째는 다음과 같다.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다. 이 문장을 보니 버스 사건이 왜 부당했는지 깨달았다. 하차 벨을 다소 늦게 누른 학생들의 부주의를 어른이 지적하고 싶더라도,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다. 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짧게 한마디 해도, 충분히 기사와 승객 간의 규칙을 인지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하차 벨 없이 갑자기 뒷문 열어달라고 하는 승객을 나도 종종 보곤 하니까 말이다. 그럴 때 승객이 어른이든 어린이든 부드럽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어린이도 독립된 인격체임을 자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