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책과 나 01화

나의 계몽일지

(feat. 국화꽃 향기)

by 최고수정

대학교 새내기의 눈에는 교정에서 아는 얼굴만 봐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 학과 사람들 가운데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아는 사람을 봤을 때는 더욱 그렇다. 학교 도서관에서 전공서를 대출하려고 학생증을 건네던 순간이었다. 과 동기 한 명이 사서가 있어야 할 대출 데스크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사서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라고 했다. 무조건 나도 그 근로장학생이 되고 싶었다.


대학생이 된 3월부터 나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고향 집은 차로 4시간이나 걸린다. 갓 성인이 되어 부모의 눈을 벗어나게 됐겠다, 불타는 연애 불타는 외박 혹은 불타는 클럽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일하게 된 도서관 반납부서의 담당 사서와 유사 모녀 관계가 되면서 그럴 수 없었다. 기숙사 사감들과 잘 아는 사이라며 몸가짐 조심할 것을 압박했고, 불쑥 통금시간을 지켰는지 확인할 때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 사서는 책으로 나를 계몽시켰다.


‘그렇게 제목만 보고 읽을 걸 고르면 어쩌냐’, ‘저자 이름을 외웠다가 전작들을 살펴봐라’, ‘좋았던 책은 10년 후에도 다시 읽어 봐라’, ‘여러 번 대출됐다고 다 좋은 책은 아니다’ 등등. 그런 식의 매뉴얼을 장착한 채 나는 신간이나 예약 도서 중 구미에 당기는 책을 찾아 나섰다. 자유시간이 갑작스레 쏟아져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르던 시기였다. 자취생이었다면 장을 보고 요리했을 시간에 나는 책을 고르고 읽었다.


그러다 운명을 만났다. 김하인의 장편소설 <국화꽃 향기>였다. 국화꽃 향기를 지닌 한 여자를 어떤 남자(배우 박해일 느낌의 남자)가 열렬히 사랑하고, 자식이라는 선물까지 받게 되지만 그녀와 장렬하게 사별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밥도 먹지 않고, 밤잠도 자지 않고 몰입한 인생 최초의 경험이었다. 여기서 ‘밥을 먹지 않고’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기숙사는 하루 세 번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미적미적하다 저녁을 놓치고 통금인 자정이 지나면 동트기까지 꼬박 굶어야 한다. 거의 무명에 가까운 작가의 소설에 끼니까지 거르고 날밤을 꼴딱 샜다. 300쪽 분량의 책이 1권과 2권으로 구성됐다. 완독까지 7~8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밤의 정적과 함께 책에 빠진 시간이 아주 황홀하고 평화로웠다. 감정이입을 심하게 해서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이 작품은 영화로 제작되기도 해 다채로운 즐거움까지 내게 선사해 주었다. 우와~ 독서가 이런 거였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이후 소설이든 뭐든 예리하게 읽어 나갔지만 이 세계와 권태기가 온 적도 있다. 취업과 직장생활에 몰두할 때였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바쁘기도 했고, 쉬기엔 더 바빴다. 에너지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니 시간과 에너지 모두 가득해졌다. 물론 출산이라는 복병(?)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TV, 책을 보다>라는 kbs 프로그램을 볼 때 대학 시절 멘토였던 사서 목소리가 다시 귀에 맴돌았다. 막 유부녀가 된 나는 몸뚱이 잃은 귀신 마냥 도서관과 서점을 서성거렸다. 이때부터 좋아하는 분야가 좁아진 것 같다. 독서 취향을 중심으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할 때 나는 인문학이라고 말하게 되었으므로.


그럼에도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출산을 하고 나서 알았다. 갓난쟁이를 달래느라 통잠을 자지 못하고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는 것이 힘든 와중에도 도서관에 다녔다. 나만의 고립감을 해소시킨 방안이 독서였던 것이다. 그 기세로 지금까지도 꾸준히 책을 읽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직장에 안 다녀도 되니 시간과 에너지가 모이고 있다. (생계를 책임진 남편님, 존경합니다.) 지금 내게 시간과 에너지가 티끌이나마 더 남아있다면 알토란처럼 쓰고 싶다. 100세 시대에 시력 관리를 철저히 해서 매해 운명의 책을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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