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담담)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안윤 작가의 단편소설 <담담>을 읽고 나니, 저자가 내게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2024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가운데 나는 심사평을 먼저 읽었다. 가장 끌렸던 우수상 수상작인 <담담>을 읽다 보니 이 작품이 나만의 대상작이었다. 누가 나에게 내 정체성을 알고 있느냐고, 정체성에 맞게 살고 있느냐고 물어주길 기다렸던 것 같다. 소설은 비혼주의자인 40대 여성 혜재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스스로를 이끌어가는 과정이 몰입도 높게 잘 그려졌다.
그녀의 20대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한 솥에 다 들이부은 비빔밥 같았다. 불안과 혼란이라는 양념장이 아주 매웠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거스를 수 없는 해일 같은 감정들이 소설의 주된 재료였다. 주인공의 인생사, 그중에서도 연애사는 파란만장했다. 여러 종류의 격렬한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뒤섞여서, 성적으로 남녀에게 모두 끌리는 ‘양성애자’라는 그녀의 정체성은 핵심 소재가 되지도 못하는 정도였다.
그녀는 레즈비언(lesbian)인 수윤과 11년간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일 수 없는 관계다. 그래서 줄곧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될 수 없었다. 그 점이 안타까우면서도 서글펐다. 후반부에 공개되는 수윤의 처지는 화룡점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관계의 진정한 끝맺음을 보는데 가슴이 묵직해졌다. 서른 페이지도 안 되는 이 짧은 글을 읽는데 눈물은 대하소설 수준으로 흘렸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공감이 잘 가도록 풀어내는 작가는 실력자였다. 단편소설의 매력을 잘 몰랐던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결혼이 혜재의 성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일지 아닐지 고민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한 번 결혼한 적 있는 남자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부터다. 사실 은석이라는 소개팅남의 등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작가는 은석의 사연까지 합쳐 인간의 ‘생로병사’를 가볍게 건드리면서 독자들에게 물어 나간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뭐냐고.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묻는다. 누군가는 바이섹슈얼(bisexual)로 태어나고, 무모한 젊은 시절을 거치며 나이 들어가고, 몇 살이든 암 환자가 되고, 사고든 뭐든 결국 죽게 돼 이별하는 그런 생로병사를 알고 있지 않느냐며 조근조근 물어댄다. 당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 하나만 대 보라고.
혜재는 수윤을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굴레를 벗고, 은석과 함께 알 수 없는 운명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그럼에도 결혼이라는 흔한 해피엔딩(?)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주인공들이 과거에 어떤 사랑을 했든 새로운 연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자신의 자리를 고민하고 깨닫는 혜재를 통해 죽음이 아닌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가슴을 아리게 했다. 기분 좋은 먹먹함이었다. 담담한 희망을 보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제목 ‘담담’은 내게 약했다. 차라리 ‘솔방울 줍기’였다면 어땠을까. 어릴 때 한 번쯤 다 해본 솔방울 줍기. 처음은 아니지만 데이트할 때 막상 해보면 재미가 있다. 다시 주울 일 없을 거라 장담했지만, 언제가 또 줍기도 할 것이고 그것도 나쁘지 않고 좋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 주인공 혜재가 다시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또 시작하게 되는 사랑과 참 비슷하다.
출산을 한 이후 나는 딸이라는 자리에서 어머니가 됐다. 엄마라는 정체성은 내가 선택했다는 점에 있어 만족스러운 편이다. 물론 고되기는 하다. 내 정체성 중 또 다른 하나는 당연히 아내라는 모습이다. 전업주부인 나는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정체성일지 잠시 고민해 봤다. 자녀가 미성년이라는 점에서 엄마 역할이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긴 하다. 그건 내 욕망과는 다르다. 아내라는 정체성이 내게 가장 중요하길 바란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에 비하면 내가 헤테로(다른 성별에만 끌리는 이성애자)라는 점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나의 성정체성이 주류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게 말이다. 특정 종교인들의 혐오를 받지 않고 살고 있는 게. 이 소설처럼 성소수자들을 전면으로 내세운 작품이 지금보다 더 자주, 더 활발히 한국 문학에 등장하길 기대한다. LGBTQ+이라는 소재가 대다수 독자들에게 담담하게 받아들여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