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급류)
인디언 속담 중에 ‘우정이란 내 슬픔을 등에 메고 가는 자’라는 말이 있다. 정대건의 장편소설 <급류>에서는 ‘사랑이란 상대방의 지옥을 짊어지는 선택지’라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 도담의 첫사랑인 해솔은 그녀의 어떤 지옥도 짊어지려 했다. 도담의 아버지와 해솔의 어머니는 급류에 휩쓸리는 사고로 동시에 목숨을 잃었다. 같은 비극을 경험한 채 성인이 된 둘. 동일한 고통을 가졌기에 두 사람은 10년이 지나도 서로에게 달려들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과 재회하고 싶어 하는 이에게 이 소설은 한 가닥의 희망이 될 것 같다.
해솔이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이들은 이별했다. 성인이 된 도담은 술에 의지한 채 목적지 없이 부유(浮遊)하고 분열하는 삶을 살게 된다. 30대의 해솔은 도담의 아버지처럼 소방관이 되었다.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롤모델 삼아, 스스로를 용서하는 방법을 찾지 못해 소방관의 삶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실 급류 사고가 나기 전 자신이 전조등을 비추는 장난만 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죄책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도담과 두 번이나 이별하면서 해솔은 스스로 단단해졌을 뿐 아니라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헌신할 정도로 탄탄한 사람이 되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생명과 사랑이라는 주제 의식이 해솔의 직업을 통해서 잘 전달되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 속 소방관 이야기는 15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소설 <급류>의 영상화가 시급하다! 영화감독 출신인 정대건 작가님, 보고 있나요.
제목 ‘급류’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빠지다’는 단어였다. 작가는 급류에 빠지듯이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 중요한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 인간들이 사랑에 빠지기 전에 신이나 자연이 나타나 경고문이라도 고지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도담과 해솔이 그렇듯, 누구나 그렇듯, 나도 그렇듯 서로에게 빠져든 계기는 우연에 불과했다. 냉소에 빠진 대학생이었던 도담은 해솔을 우연히 만나 격정 같은 사랑에 다시 빠진다. 장례 이후 한 번도 물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종국에는 바다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절망에도 빠지고, 슬픔에도 빠지고, 빠질 수 있는 것에는 거의 다 빠진 것 같다.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책이 가진 물성이 더욱 좋아졌다. 소설의 절반에 다다랐을 때까지도 잘 빨려 들어가 감정의 소용돌이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했다. 10대의 연인들이 폭포 아래에 잠수해, 입맞춤도 아니고 손깍지를 잡는 게 이토록 황홀할 일인가. 둘의 알콩달콩 순간과 각자의 가치관대로 살아 나가는 내용도 흥미진진했지만 아직 절반이 더 남아있다는 손가락 끝 감각이 어찌나 좋던지……. 3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집중이 잘 되는 작품이지만 나는 일부러 아껴가며 책장 하나하나를 넘겼다. 특히 소방관이 된 해솔이 무모하게 몸을 던진 구조 현장에서 죽을까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왠지 작가는 연애할 때도 밀당을 잘했을 것만 같다.
이 소설의 단점이 있을까. 작품의 내용만큼 초판본 표지의 급류 그림(박미경 작가의 ‘An obscure Island’)이 아주 인상 깊게 남는다는 것 정도? 눈앞에 이미지가 그려질 정도로 작가가 작품을 흘려 내려보내는 솜씨가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또 반전도 있다. 작품 전반에 조용히 묻어나 있는 해솔의 자책감에 대해 나는 이미 충분히 이입해 있었다. 그런데도 후반부에 나오는 반전은 해솔의 감정을 강하게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가슴이 아릴 만큼 내게는 반전도 중요했다. 2022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역주행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는데, 당신은 어떠신가. 한번 빠져 보시겠습니까.